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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1.05 18:12 수정 : 2017.01.05 20:10

촛불의 가장 큰 위력은 새로운 시민권력을 그려보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권력은 직접민주제의 확대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더 본질적인 것은 우성(優性)의 문화권력으로서 자본의 지배와 구태에서 벗어나기 힘든 현실의 정치권력이 거역할 수 없는 하나의 큰 흐름을 만드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21세기 한국의 위대한 르네상스운동이다.

이남곡
인문운동가

사교(邪敎)에 세뇌된 인격파탄자의 무능과 거짓 그리고 치졸한 국정농단, 그것을 방조한 범죄자들의 공공연한 책임회피와 거짓말, 대낮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우리 사회의 민낯이 우리를 수치심과 분노로 힘들게 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앞으로 독재정권은 출현하기 어려울 것이다. 저항 주체로서의 시민은 튼튼하게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양한 세력이 합의나 연정을 통해 ‘통합력과 추진력’을 갖는 정치 형태에 대해서는 경험도 없거니와 그런 정도의 정치문화를 축적하지 못했다.

시민 사회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점이 미래를 극히 불안하게 한다.

그래서 신년 벽두에 ‘화쟁’(和諍)을 떠올린다. 나는 이 단어를 특정 종교를 넘어 보편적 의미로 사용한다. 정반합(正反合)의 연속적 과정을 통해 도달해가는 궁극의 목표가 중도며, 거기 도달하는 평화적 방법이 화쟁이다. 피로 얼룩진 거친 과정을 지나 인간의 지혜를 최대로 활용하여 그 길을 가는 것이다.

완고한 수구세력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오해하거나 심지어 비난하는 것을 보는 것이 안타깝다. 화쟁은 모순을 호도하거나 봉합하면서, 타협하고 협상하는 기술이 아니다. 투쟁보다 화쟁이 수십 배 어렵다는 어떤 노동운동가의 말이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이해한다. 그러나 이제 콘크리트화한 집단관념들을 해체하고 화쟁하지 않으면 세계적으로 우수한 자질을 가진 우리가 그 능력을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공멸할 위기에 처할지 모른다.

사람은 사실을 그대로 인식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자신의 감각과 판단을 통해 사실에 접근할 뿐이다. 과거 축(軸)의 시대의 현자들은 직관적 지혜로 이것을 자각하고, 불가지론이나 아집에 빠지지 않고 끝까지 진실을 추구하였다.

요즘은 과학의 발전으로 중등학교 정도에서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은 다만 지식에 머물 뿐 현실의 삶과 사회적 실천에서는 거의 유리되어 있다.

원효의 화쟁하는 방법은 ‘비동비이이설’(非同非異而說)이다. ‘무엇이 모두 틀림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전적인 동조를 안 하는 것(非同)이어서 리(理)에 어긋나지 않으며, ‘무엇이 모조리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전적인 배격이 없는 것(非異)이어서 정(情)을 해치지도 않는 것이다. 그러면서 요즘 말로 하면 양비론이나 양시론으로 흐르거나 대립으로 치닫지 않고 모두의 지혜를 모아 그 시점의 의(義)를 찾아 실행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이런 화쟁의 능력이다. 화쟁은 과학이며, 진영논리를 넘어서 나라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다. 마침 촛불의 힘이 새로운 다당제를 등장시키고 있다. 선거제도만 개혁하면 좀더 신선한 정당들도 원내에 진입할 것이다. 정치권에서도 협치와 연정의 현실적인 여건들이 마련되고 있다. 그러나 과거 몇 번 있었던 일시적이고 정치공학적인 야합으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나아가 촛불의 가장 큰 위력은 새로운 시민권력을 그려보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권력은 직접민주제의 확대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더 본질적인 것은 우성(優性)의 문화권력으로서 자본의 지배와 구태에서 벗어나기 힘든 현실의 정치권력이 거역할 수 없는 하나의 큰 흐름을 만드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21세기 한국의 위대한 르네상스운동이다.

새해를 맞아 원효의 호연지기를 덕담 삼아 선물하고 싶다. 이제 현실이 될 수 있는 선각자의 꿈을 내 나름으로 의역해 본다.

“종교와 과학, 주체적 자각과 사회적 실천, 마음과 현상이 서로 어울려, 펼침과 합함이 자재하고(開合自在) 주장하고 반대함에 걸림이 없는(立破無碍) 세계를 향해 나아간다. 산개하면 개인이고, 보합하면 공동체다. 개인의 자유가 마음껏 발휘되어도 무질서와 혼란으로 번잡하지 않고(開以不繁), 함께 사는 공동체라도 서로 침범하고 간섭하는 좁은 세상이 되지 않는다(合以不狹). 개개인의 생각을 충분히 존중하면서 실제 행동은 모두의 뜻을 모아서 하고, ‘내 생각이 틀림없다’는 꼬리표가 붙지 않아서, 주장하여도 걸림이 없고(立以無碍), 반대하여도 잃음이 없는(破以無失) 대자유의 삶을 즐긴다.”

정유년 새해는 이런 밝은 기풍이 마음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에서 점차 넓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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