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3.02 18:28
수정 : 2017.03.02 20:51
‘연정’은 결코 길게 갈 수도 성공할 수도 없는 정치공학적 야합이 아니라, 어차피 이 시대 이 공간에서 함께 살아야 할 공동체라는 것을 전제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첩첩한 내우외환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야 할지에 대한 절박한 물음에 응답하는 길이다.
이남곡
인문운동가
나는 몇 년 전부터 일관되게 ‘연정(聯政)과 좌도우기의 개혁’을 제안하고 있지만, 그 어려움을 잘 안다. 가장 큰 어려움은 그 주체들의 정체성이 애매하다는 것이다. 즉 좌우·보혁의 ‘정명’(正名)이 절실하다. 이른바 진영이라는 것이 사실보다는 낡은 관념에 지배받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그렇다고 먼저 정체성을 확립하고 연정을 추진하자고 하는 것은 나라의 엄중한 상황을 볼 때 너무 늦어 둘을 동시에 추구해야 할 것 같다. 사람이든 집단이든 욕망이든 사상이든 시스템이든 스스로 진화하지 않으면 한때는 동력으로 작용했더라도 반드시 장애로 되는 때가 온다. 지금 우리의 위기는 바로 업그레이드의 위기다.
요즘 연정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악한 세력과 손을 잡거나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이야기와는 전혀 맥락이 다르다. 언젠가 이 칼럼에서 이야기했지만 원점에서 생각해보기로 한다. 사람들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가 충족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제도를 발전시키는 것이다. 둘째는 인간의 물질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도록 생산력을 확보하는 것이다. 셋째는 인간의 의식이 진화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가 조화되어야 행복한 세상이 된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서로 충돌하는 면이 많다.
자유와 평등은 평면상에서는 모순을 일으킨다. 자유가 지나치면 강자와 약자의 불평등이 심해져 약자의 실질적 부자유가 커지고, 평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악평등’이 발생해서 자유 욕구가 억압되고 생산성을 떨어트리게 된다. 그래서 그 조화를 위해 제도적 장치도 필요하지만 의식의 진화를 통해 입체적으로 뛰어오름이 절실하다.
서로 다툴 필요가 없을 정도의 물질적 생산력이 필요조건이지만, 탐욕이 양보하고 싶어지는 의식으로 변하지 않으면 결코 행복할 수 없다. 1:99나 10:90 등의 불평등 구조가 우리가 해결해야 할 최대의 난제가 되고 있는데, 어떻게 생산력을 떨어트리지 않고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상위 10% 안에 드는 사람들의 의식의 진화는 사회 통합과 연대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데 대단히 중요하다. 또한 자본주의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침범이라는 원죄를 해소해야 한다.
정신적·예술적 욕구가 커지면 물질에 대한 욕구는 자연스럽게 줄어든다. 즉 사람의 욕구의 질이 바뀌어 ‘단순 소박한 삶’을 선택하는 것은 참아야 하는 ‘가난’이 아니라 진정한 ‘풍요’의 길이다. 지금의 의식혁명은 과학적인 인식을 통해서도 종교적인 실천을 통해서도 가능하지만, 과거의 도덕윤리운동과 달리 자발성과 기쁨이 그 동력이다. 이 요소들을 포괄하고 삼투하는 큰 흐름을 만드는 것이 우리 시대의 과제다.
‘연정’은 결코 길게 갈 수도 성공할 수도 없는 정치공학적 야합이 아니라, 어차피 이 시대 이 공간에서 함께 살아야 할 공동체라는 것을 전제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첩첩한 내우외환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하고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야 할지에 대한 절박한 물음에 응답하는 길이다.
합리적이고 양심적인 보수와 진보가 원점에 서서 실사구시하면 큰길이 보인다. 합리라는 것은 리(理)에 부합하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인간의 사물에 대한 인식은 자신 또는 그 집단의 감각과 판단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사실 그 자체와는 별개인 것이다. 따라서 자기 판단을 절대화하는 것은 리(理)에 부합하지 않는다. 비이성적 정서에 빠져 있는 사람 못지않게 자기 확신이 강한 논리적 사람들도 합리적이기 어렵다. 단정하지 않고 중지를 모아 우리 시대와 사회에 가장 옳은 방향을 함께 찾아가는 태도가 합리라는 말의 핵심이다.
양심이라는 말은 자신의 사고와 행동이 혹시 자신의 폭(幅)을 넓혀 타자를 침범하는 것이 아닌지를 스스로 돌아보고, 만일 그렇다면 그 침범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개선하려는 마음이 일어나는 상태를 말한다. 보통 말하는 ‘착하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스스로 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운데 합리적이지 않고 선악의 이분법에 사로잡혀 극단적인 침범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긴 터널을 통과하고 있다. 터널 넘어 어떤 세계를 열어갈지는 우리의 보편적 욕망체계와 집단지성이 합리적 양심을 바탕으로 얼마나 진척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시간이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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