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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8.18 17:57 수정 : 2016.08.18 20:40

박보나
미술인

<미친년·발화하다>는 천안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박영숙 작가의 개인전 제목이다. 이 전시에서 작가는 1999~2005년 사이에 찍은 ‘미친년’들의 사진을 선보인다. 사진 속 ‘미친년’들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 ‘미친년’들이 맞다. 옷도 제대로 입지 않고, 화장도 삐뚤게 하고, 잔뜩 어지르고, 더러운 것을 묻히고 있는 여자들 말이다. 그런데 이 ‘미친년’들은 왠지 별로 낯설지 않다. 그녀들은 나를, 그리고 나의 어머니를, 그리고 어머니의 어머니를, 그리고 그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들을 연상시킨다. ‘미친년’은 예전에 거기에도 있었고, 지금 여기에도 있다.

박영숙, 꽃이 그녀를 흔든다 #14, 컬러프린트, 120×120㎝, 2005년. 이미지 아라 제공
19세기 샬럿 브론테의 소설 <제인 에어>에서도 제인 에어와 로체스터의 사랑을 방해하는 로체스터의 부인인, 버사라는 ‘미친년’이 등장한다. 소설에서, 유전된 광기와 색정증 때문에 골방에 감금당해 있다는 버사는 마치 동물처럼 묘사된다. 그녀는 결국 집에 불을 질러, 남편 로체스터를 부상 입히고 본인은 불타 죽는다. ‘미친’ 부인도 사라졌겠다, 로체스터와 제인 에어의 사랑은 행복한 결말을 맺는다. 그런데 버사에 대한 다른 이야기가 있다. 식민지 흑인과 영국 백인 사이에서 태어난 크리올 엄마를 둔 진 리스는 소설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에서 버사의 이야기를 다른 관점으로 다룬다. 이 소설에서 돈 때문에 식민지 농장주인 크리올 여성 앙투아네트와 결혼한 젊은 로체스터는 불만이 많다. 그는 유럽과는 다른 낯선 자연 환경과, 이해할 수 없는 식민지 문화와, 순수한 영국 태생의 백인이 아닌 크리올 아내를 증오한다. 로체스터는 마음대로 지배할 수 없는 이 모든 것을 야만과 비이성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결국, 결코 이해할 수도, 이해하기도 싫은 이 식민지와 여성이라는 타자들을 ‘미쳤다’고 규정한다. 로체스터는 앙투아네트의 자연, 즉 태양을 닮은 정열과 ‘야만적’ 본성을 빼앗기로 결심한다. 마음대로 앙투아네트의 이름을 버사로 바꾸어 부름으로써, 그녀의 주체적·문화적 정체성을 말살시키고, 서늘한 회색 ‘문명’의 영국으로 데려와 ‘미친년’이라며 골방에 가둠으로써 그녀에게서 태양을 거둬버린다.

박영숙 작가의 미친년들은 가부장 지배 질서 안에서 요구받는 순종적 역할과 태도를 거부하는 앙투아네트로, 본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버사로 불리는 ‘미친년’들이다. 남성 중심의 사회 구조에서, 가정적이고 희생적인 어머니의 역할과 단정하고 조신한 여자의 역할을 포기했기 때문에 비난받는 마녀들이다. 작가의 사진에서처럼, 생선을 손질하다 말고 잠시 꿈을 꾸고, 화분에 물을 주다 말고 아름다운 저 너머를 상상하고, 아이를 돌보다 말고 태양에 넋을 뺏기는 ‘이상한’ 여자들을 위한 자리는 없다. 가부장적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으로서의 역할을 멈추고 딴생각을 하고 있는 여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비이성이고, 컨트롤할 수 없는 야만이자 자연이며, ‘미친년’으로서, 공포와 억압의 대상일 뿐이다.

1세대 페미니스트 미술가인 박영숙 작가의 그녀들은 남자 사진가들이 찍은 여성들과는 많이 다르다. 남자 작가의 사진에서 여성은 대부분 욕망의 대상이자, 소외된 타자로서, 수동적 피사체로 존재한다. 하지만 박영숙 작가가 찍은 ‘미친년’들은 성적으로 신비화되어 있지도 않고, ‘여고생’이나 ‘한국 여자’ 같은 일반적인 사회적 분류에 타자로서 무심하게 묶여 있지도 않다. 사진의 여성들은 작가와 친분이 있는 여성 운동가나 예술가들로서, 작가와 동등하게 교감하며 관객을 주체적으로 응시한다. 박영숙 작가는 여성을 폄하하는 ‘미친년’이라는 단어의 원래 의미를 해체시키고 재맥락화한다. 그녀에게 ‘미친년’은 남성 중심의 질서 안에서 억압받는 수많은 여성들이고, 그 안에서 주체적 실존감을 깨달아 다른 꿈을 꾸는 존재들이다. 기존의 질서를 어지르고 흐트러뜨리고, 삐뚤게 그리는 박영숙 작가와 ‘미친년’들의 사진이 신난다. 그들의 만개가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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