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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9.08 18:22 수정 : 2016.09.09 09:58

박보나
미술인

알랭 레네의 영화 <히로시마 내 사랑>에서는 전쟁에서 연인을 잃은 프랑스인 그녀와 원자폭탄의 투하로 가족을 잃은 일본인 그가 등장한다. 영화 ‘평화’를 찍기 위해 히로시마에 온 프랑스 여배우 그녀는 히로시마에 머무는 이틀 동안 일본인 건축가 그와 만나 관계를 갖는다. 두 남녀의 육체와 히로시마의 현재와 과거 영상의 겹쳐짐 속에서, 여자는 ‘나는 히로시마에서 모든 것을 보았어요’라고 계속 말하고, 남자는 ‘당신은 히로시마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어’라는 대사를 반복한다. 처음 방문한 낯선 히로시마에서 여자는 당연히 도시의 고통스러운 역사를 온전히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하지만 히로시마의 비극은 그녀가 겪은 프랑스 느베르에서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다시 불러일으키고, 여자는 그 상기된 기억을 통해 히로시마를 통감한다. 그렇게 여자는 히로시마에서 모든 것을 보았다. 이 영화에서 느베르와 여자, 히로시마와 남자는 별개의 주체로 존재하는 동시에, 각자의 과거와 현재 속에서 서로 얽히고 겹쳐진다.

도라 가르시아의 <녹두서점·산 자와 죽은 자, 우리 모두를 위한>(설치, 2016) 이미지 광주비엔날레 제공. 촬영 김사라
지난 9월1일 개막한 국제 미술 행사인 광주비엔날레에서, 스페인 미술가 도라 가르시아의 <녹두서점-산 자와 죽은 자, 우리 모두를 위한>은 광주의 5·18 민주항쟁을 직접적으로 다루면서 도시의 문맥을 반영한 작품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이것은 1980년 5·18 광주민주항쟁의 거점이었던 녹두서점을 비엔날레 공간 안에서 임시적으로 재현한 작업이다. 작가는 재현된 녹두서점 안에서 당시 민주화 운동의 중요한 힘이 되었던 서적들을 전시하고, 서점의 설립자인 김상윤씨의 토크 등을 진행하면서, 광주의 역사를 현재로 다시 소환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시도는 실패했고, <히로시마 내 사랑>의 그녀와는 달리, 가르시아는 광주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가르시아의 작업에서는 작가가 5·18을 이해하는 방식이나 관점, 그리고 광주와의 관계는 거칠게 생략되어 있다. 작가는 광주를 자기의 경험으로 전환시키고 통감하는 것이 아니라, 리서치의 대상으로 바라본다. 리서치 자료에서 녹두서점만을 오려내어 전시장 안에 옮겨 놓은 작업에서, 5·18항쟁의 토대가 된, 당시 서점에서 이루어졌던 새로운 역사관의 배양이나, 연대의 역할, 혹은 전복적 정신 등은 지금의 세대에게 전혀 전달되지 않는다. 느베르를 지우고 히로시마가 될 수는 없는 <히로시마 내 사랑> 속의 그녀처럼, 외부자로서의 관점과 개인적 경험을 뺀 텅 빈 리서처로서 작가는 광주가 될 수는 없다. 결국, 광주를 다 보지 못한 가르시아는 녹두서점에서 포스터를 제작하는 미술 워크숍을 열고, 대자보를 써서 전시하는 미술 퍼포먼스를 진행하며, 미술 작가들의 출판 행사와 함께, 시각예술 전문 서점 북소사이어티의 미술 관련 서적들을 전시, 판매한다. 가르시아의 녹두서점에서 5·18이라는 역사적 맥락은 결박된 그림자로서 유령처럼 아른거릴 뿐, 작품의 완성을 욕망하는 작가와 넘치는 미술만이 주인공으로서 잔뜩 조명을 받는다. 이 미술 무대에서 광주민주항쟁의 기억은 현재로 경험되는 것이 아니라 박제된 향수 어린 과거로, 그리고 미술 작품으로 감상될 뿐이다.

반면, 같은 비엔날레 참여작가인 멕시코 미술 작가 그룹, 코페라티바 크라테르 인베르티도가 경험하는 광주는 좀 더 흥미롭다. 이들은 부패 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한 멕시코 아요치나파 학생 대학살 사건과 5·18 광주민주항쟁을 나란히 배열하여 5·18민주화기록운동관에서 전시한다. 이들은 광주의 역사를 작가의 개별적 기억으로 다시 상기함으로써 광주를 이해하고, 관객은 이들의 작업을 통해 멕시코의 지금에서 광주를 경험한다. 예술은 역사를 재료로 소비하면서 대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의 이해와 해석에 확장된 상상력을 더해 현재의 경험으로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가르시아의 녹두서점 작업의 무심한 뭉툭함이 여러모로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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