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12.22 18:22
수정 : 2016.12.22 20:24
김일송
공연 칼럼니스트
“이 순간 나를 여자가 아니게 해다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에 잔인함이 넘치도록 해다오. 내 피를 엉기게 하여 동정심으로 통하는 길목을 막아버려라. 연민의 정이 이 흉측한 계획은 동요시키지 않게 해다오! 자, 오너라, 살인마들이여, 내 품안으로 와서 내 젖을 담즙으로 바꾸어다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 이야기는 개선장군 맥베스가 ‘왕이 될 운명’이라는 마녀들의 전언을 듣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나 남편의 우유부단으로 인해 왕이 될 기회를 놓칠까 걱정된 레이디 맥베스는 남편을 추동하기로 한다. 인용한 대목은 바로 이 장면에 등장하는 대사다. 이후 레이디 맥베스는 흉계를 꾸며 선왕을 시해하고, 남편을 권좌에 올려놓는다. 그러나 정통성 없는 권력은 오래가지 못하는 법. 결국 레이디 맥베스는 일종의 정신분열에 시달리다 죽음을 맞고, 맥베스는 정적에 의해 최후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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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극 <레이디 맥베스> 공연 장면. 국립국악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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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베스>는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유일하게 악당이 주인공인 작품이지만, 처음부터 맥베스가 역모를 저질러 왕위를 찬탈할 악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충직한 신하였다. 승전의 포상으로 얻게 된 영주 자리에 만족했을 그런 사람이었다. 실제로 선왕 살해 직전에 주저했던 모습과 살해 후에 참회하는 모습은 그의 유약한 성정을 보여준다. 하지만 마녀의 전언은, 아내의 추동은 그를 악인으로 만든다. 번역가 이태주의 말처럼 “일단 죄업의 길로 들어서다 보니 연속적으로 다른 죄를 저지르게 되는 함정”에 빠진 그는 다시는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레이디 맥베스로, 제목과 달리 <맥베스>는 맥베스보다 레이디 맥베스에 방점을 찍고 있다.
지금 국립국악원 우면당 무대에 오르고 있는 창극 <레이디 맥베스>의 연출가 한태숙은 그 점에 주목했다. <레이디 맥베스>는 동명의 연극으로 1998년 초연되었다. 레이디 맥베스를 전면에 내세워, 일종의 심리극으로 재해석한 이 작품은 이듬해 서울연극제에서 작품상, 연출상, 연기상을 수상하였고, 이후로 2~3년에 한번꼴로 재공연되는 레퍼토리로 자리잡았다. 외에도 폴란드, 일본, 싱가포르,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등 해외 연극 페스티벌에 공식 초청을 받는 등, 연극 <레이디 맥베스>는 해외에서도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이번에 무대에 오르는 창극 <레이디 맥베스>는 장르명에서 알 수 있는 창을 더한 것으로, 전작과의 가장 큰 차이는 도창의 등장에 있을 것이다. 또한 레이디 맥베스에 빙의했던 관록의 배우 서주희 대신 국립창극단 출신의 소리꾼 정은혜가 타이틀롤을 맡은 것도 큰 변화 중 하나이다. 다만 전작과의 유사성을 유지하는 부분이라면, 왕비의 전의와 맥베스, 1인 2역을 맡는 배우 정동환의 존재일 것이다. 정동환은 1999년부터 같은 배역으로 줄곧 출연해왔는데, 이번 공연을 앞두고 기자간담회를 통해 그 어느 때보다 현시국과 연결되는 지점이 많다고 말한 바 있다.
실제로 마녀의 존재는 샤머니즘이나 최태민으로, 권력욕에 달아오른 레이디 맥베스는 최순실로 치환해 읽어도 무리가 없다. 무엇보다 마녀와 부인에게 추동당해 권좌에 오르는 맥베스의 모습은 지금의 대통령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거짓을 거짓으로 덮고, 죄로 죄를 묻으려는 맥베스의 모습 또한 지금의 대통령과 전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맥베스의 마지막 대사는 이렇다.
“항복은 싫다. 풋내기 맬컴의 발 앞에 엎드려 땅을 핥고, 덫에 걸린 곰처럼 어중이떠중이들의 저주를 한꺼번에 받을 수는 없다. 비록 버넘숲이 던시네인에 접근했다 하더라도, 여자 뱃속에서 태어나지 않은 네 놈이 칼을 들고 맞서왔다 해도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버티겠다.”
촛불이 청와대 앞까지 접근하더라도, 특검이 칼날을 들고 온다 해도 마지막 순간까지 버티겠다는 대통령의 모습에 맥베스의 최후가 겹쳐지는 게 필자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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