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12.29 18:31
수정 : 2016.12.29 20:49
박보나
미술가
코언 형제의 영화 <시리어스 맨>은 매력적인 오프닝 신으로 시작한다. 폭설에 마차의 바퀴가 빠져버리는 예상하지 못한 난관에 놓인 남편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랍비의 도움으로 무사히 집으로 돌아온다. 남편은 감사의 뜻으로 랍비를 집으로 초대하는데, 더 놀랍게도 아내는 그 랍비가 유령이라면서, 칼로 찔러버린다. 칼에 찔려서 비척비척 걸어나가는 랍비를 바라보며, 남편은 더 큰 곤경에 빠졌다고 중얼거리고, 아내는 문제를 해결했다는 표정을 짓는다. 이 영화에서 인물들은 이해할 수 없는 곤란한 문제에 맞닥뜨리기도 하고, 이 문제는 다시 계획하지 않은 방향으로 해결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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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윤지의 <광나는 유니콘>(캔버스에 유화, 90.9㎝×72.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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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탁한 정치 상황과 부끄러운 미술계 성추문 사건들로 유난히 고단했던 올해에도 어김없이 졸업전시 시즌이 돌아왔다. 미술대학의 졸업전시 즈음에는 학교가 설렘과 긴장으로 가득 찬다. 4년간의 작업 결과물을 외부에 발표하는 첫 기회인 만큼, 학생들은 가능성에 대한 좋은 평가를 기대하는 동시에, 취직을 예상하지 않는 졸업 후의 미래에 대해 불안감을 갖는다. <시리어스 맨>의 부부만큼이나, 학생들은 내일을 예측할 수 없다. 내가 수업을 나가는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4학년 학생들도 현재 학교 안에서 졸업전시를 열고 있다. 전시 제목은 자그마치 ‘우리의 성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이다.
나는 이 전시 제목이 꽤 마음에 든다. 근본을 부정하는 듯해서 좋다. 제목에서의 ‘성’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혈족을 나타내는 ‘성(姓)’이 떠오르기도 하고, 남녀의 구별을 나타내는 ‘성(性)’이 연상되기도 한다. 둘 다 태어나자마자 주어짐으로써, 가부장적 씨족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수단이 된다. 하나는 아버지와, 아버지의 아버지, 그리고 그 아버지의 아버지라는 위계적 구조를 가지면서, 새로운 세대에게 이전 세대의 사고와 방식에 순종할 것을 요구하고, 다른 하나는 획일적인 규범에 모두를 편입시키면서, 보수적 가치관을 강요한다. ‘우리의 성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그래서, 졸업을 앞둔 학생들의 아버지와 선생님, 선배들에게서 벗어나, 개별성과 다양성으로 새로운 미술적 실험을 하고, 유연한 정체성으로 지금과는 다른 사회를 만들어가겠다는 젊고 패기 있는 선언으로 들린다. 예측 불가능한 작업 인생에서 종교적 가르침과 율법을 전하는 늙은 랍비의 도움 따위는 필요 없다는 표명으로 들린다.
손희민은 동물의 신체나 가죽을 주물을 떠서 흔적으로 남긴다. 서른살이 되기 전에 머슬 대회에 나가겠다는 희민이는 건강한 몸을 만드는 것에 관심이 많은데, 작업에서도 이러한 물리적 형태와 물성에 대한 흥미가 드러난다. 정혜연은 미술 작가보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다. 캐릭터를 비롯한 시공간의 중첩과 어긋남이 담긴 비디오 작업에서, 혜연이의 전통적, 영화적 내러티브 구성에 대한 도전을 엿볼 수 있다. 노혜리는 법대를 졸업하고 미술로 전공을 바꾼 늦깎이 학생이다. 연약하고 가변적인 설치물을 만들어, 그 설치물과 반응하는 신체 퍼포먼스를 통해 본인의 부유적 정체성이나 불안정한 이동을 세련되게 표현한다. 거제도에서 올라온 신윤지는 1990년대 3D 애니메이션의 부자연스럽고 기괴한 요소들을 가장 아날로그적인 매체인 유화로 표현한다. 귀여움과 불편함을 넘나드는 윤지의 그림은, 구세대에게 서울과 거제도의 거리만큼 멀게 느껴질 수 있는, 웹과 현실을 혼용시키는 포스트 인터넷 세대의 감수성을 보여준다.
졸업전시를 시작으로, 학교를 벗어나면서 학생들이 만날 세상은 구태의연하고 모순으로 가득 차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항상 그렇듯이, 모두의 순간은 <시리어스 맨>의 인물들의 하루처럼, 그리고 나의 하루처럼, 갑작스러운 난관과 그 해결의 연속일 것이다. 하지만 랍비-선생이자 선배-로부터 분리되는 순간 각자가 갖게 될 미래는 불확실할지언정 열려 있다. 자기만의 ‘성(城)’을 세워나갈 학생들의 젊음이 기대되고, 부럽고, 긴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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