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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1.12 18:20 수정 : 2017.01.12 21:22

김일송
공연 칼럼니스트

틈새로 칼바람이 들어왔다. 바람이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온 게 아니었다. 지붕과 벽 사이에 난 실틈이 바람을 더 맵게 만들고 있었다. 그 바람에 사람들 사이의 거리는 가까워지고 있었다. ‘없이 살기는 더합니다만, 차라리 겨울을 택합니다’라 말했던 고 신영복 선생의 징역살이가 떠오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쌓는 이 원시적 우정이 비단 차디찬 계절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 시절, 누구하고나 우정을 나눌 수 있으리라. 손에 촛불을 든 이라면 누구하고나.

우정을 확인했던 자리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들이 광화문광장에 세운 광장극장 블랙텐트 객석에서였다. 광장극장이라니. 광장과 극장은 닮은 듯 다른 공간 아니던가. 물론, 모든 세계 연극사 첫 페이지에는 광장이 곧 극장이었다는 문장이 실려 있다. 고대 그리스의 극장은 아고라에 세워졌다. 그러나 무대와 객석 사이에 제4의 벽이 세워지면서, 아니 그 이전부터 연극은 광장에서 멀어져 극장으로 들어갔다. 이제 연극은 밀실에서 관람하는 일종의 관음행위처럼 되어버렸다. 그리고 밀실 같은 대다수의 극장에서는 공적 담론과 담쌓은, 사적인, 너무나 사적인 공연들이 상연되고 있다. 광장의 목소리를 외면한 공연들이 범람하는 동안, 광장의 외침을 담아낸 작품들은 자본논리에 의해, 정치권력에 의해 극장에서 추방당했다.

광화문 텐트촌. 노순택 제공
광장극장 블랙텐트 이해성 극장장은 개관 선언문을 통해 그렇게 추방된 이야기들을 광장극장에 담아내겠다 천명하였다. 이를 통해 연극의 공공성, 예술의 공공성, 극장의 공공성을 처음부터 다시 배우겠다 선언하였다. 선언문에서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광장극장 블랙텐트가 “정리 해고 및 손해배상 가압류 등 노동탄압으로 고통받는 노동자들을 비롯하여, 세월호 참사 유가족, 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 등 각종 국가범죄 피해자들과 동시대 시민이 만나는 시민극장” 역할을 하겠다는 부분이었다.

사실 광장극장은 오롯이 무대예술인의 힘만으로 세워진 건 아니었다. 터를 닦고,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올리기까지 물론 연극인들의 노고가 가장 컸지만 여기에는 걸개현판을 만든 판화가 이윤엽 등 동료예술가들의 도움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쌍용자동차와 기륭전자, 콜트콜텍, 유성기업 등 해고노동자들의 보이지 않는 조력이 있었다. 제일 나중에 소개했지만, 사실 가장 힘주어 강조해 소개하고픈 이들이 바로 해고노동자이다. 이들을 위해서라도 광장극장이 오래 존치되면 어떨까.

하지만 이런 바람과 달리, 광장극장은 박근혜 탄핵과 함께 문을 닫을 예정이다. 부패한 정치권력의 퇴진을 바라 마지않는 이 어디 있겠는가. 그들과 함께 블랙리스트 작성에 관여한 전·현직 공무원과 문화예술기관장 또한 공직에서 물러나는 건 모두의 바람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사라진다 하여,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손해배상 가압류를 청구하는 자본권력이 함께 무너지겠는가. 재벌개혁이, 부패청산이 하루아침에 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노동자 탄압도 당장 끝나진 않을 듯싶다. 이때 광장극장에서 파업노동자를 주인공으로 한 <노란봉투>가, 감정노동자의 애환을 다룬 <전화벨이 울린다>가, 콜트콜텍 해고노동자들이 직접 출연한 <구일만 햄릿>이 무대에 올라 노동자의 이야기를 전하고, 노동자를 위로하고 응원한다면 존재의 가치가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광장극장의 존치를 바라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다시는 부끄럽지 않게, 부끄러운 오늘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오늘을 잊지 않도록, 광장극장이 상징적 조형물로서 그 기능을 다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것이 너무 큰 바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당장은 당장 소박한 꿈 하나만 꾸련다. 광장극장을 그득 채운 시민들이 서로의 온기로 추위를 몰아내고, 원시적 우정을 체험하는 것, 그 하나의 바람만이라도 이뤄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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