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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1.19 18:33 수정 : 2017.01.19 20:26

박보나
미술가

장영혜 중공업(www.yhchang.com)은 장영혜와 마크 보주가 1999년에 결성한 듀오 작가 그룹으로, 직접 작곡한 경쾌한 음악과 텍스트로만 이루어진 애니메이션을 통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과 욕망을 표현하는 작업을 해왔다. 삼성중공업이나 현대중공업처럼, 무겁고, 물질적이며, 대기업스러운 느낌을 주는 ‘중공업’이 들어간 이들의 그룹명은 그룹의 활동과 거의 무관하고 작업 내용과도 상반되는데, 이미 여기서 유희적이고 풍자적인 이들 작업의 어조가 드러난다. 지난 6일에 아트선재센터에서 오픈한 개인전 <세 개의 쉬운 비디오 자습서로 보는 삶>에서, 장영혜 중공업은 우리의 삶과 사회의 부조리와 역설을 담은 작업을 선보인다.

장영혜 중공업의 ‘삼성의 뜻은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2016).
전시장 1층에 설치한 ‘불행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다’는 저녁상에 둘러앉은 가족들의 대화이다. 서로의 상황과 인생에 대해 공허한 얘기들이 오가다, 취직과 성공 이야기가 나오자 술잔을 집어 던지고, 밥상을 엎어버린다. 아이들은 휴대폰에 고개를 파묻고 있다 힐끔 쳐다보고, 애먼 개만 계속 짖는데,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다. 2층의 ‘삼성의 뜻은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에서처럼, 삼성 병원에서 태어나서, 삼성 제품들을 쓰면서, 삼성 아파트에 살기 위해 평생을 일하다가, 삼성 장례식장에서 죽는, 그런 삼성 인생도 주변에 흔하다. 3층의 ‘머리를 검게 물들이는 정치인들 -- 무엇을 감추나?’에서 나오는 까맣게 물들인 정수리를 보여주며 사과를 하는(표를 구걸하는) 정치인들을 보고 있자니, 생각나는 얼굴들이 줄줄이다.

장영혜 중공업의 이번 작업은 이전 작업에 비해 상당히 사실적이다. 예를 들어, 시어머니 집에서 삼성 세탁기의 모서리를 붙잡고 오르가슴을 ‘팡팡’ 느끼는 여자의 이야기인, ‘삼성의 뜻은 쾌락을 맛보게 하는 것이다’에 비하면 심각하고 진짜 같다. 넘치는 세탁 거품 위에서 신음하며 허우적대다가 시어머니에게 욕을 얻어먹는 여자의 이야기는 거대 자본에 대한 실체 없는 환상과 욕망을 표현한 다분히 초현실적인 작업이었다. 반면, ‘삼성의 뜻은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 등의 이번 작업들은 너무 현실적이어서 실망스럽기까지 하다. 산재 인정도 못 받은 삼성 반도체 공장의 노동자가 백혈병으로 79번째 사망한 뉴스에 이어, 삼성 이재용 부회장이 머리를 까맣게 물들인 정치인들에게 430여억원의 뇌물을 건넨 혐의로 구속 영장이 청구되었다는 삼성 <제이티비시>(JTBC) 뉴스를 삼성 텔레비전으로 막 봤던 차였다. 현실이 이미 엉망진창으로 초현실적인 나머지, 예술 작업의 상상적 허구와 유머러스한 수사를 앞지르는 형국이 몹시 암울하다.

다수의 동의로 뽑은 정치인들은 머리를 물들인 채 계속 거짓말을 할 거고, 재벌들은 이름과 순서만 바꿔가며 다시 죽음을 의미할 것이다. 지금처럼 모두가 돈과 권력만을 향해 내달리다간, 우리는 계속 좌절할 것이고, 외로울 것이고, 불행한 나머지 술잔을 집어 던지고, 밥상도 엎어버릴 것이다. 장영혜 중공업은 우리의 잘못된 욕망과 못생긴 맨살을 드러냄으로써, 이제는 자습서를 스스로 새롭게 쓰라는 쉽지 않은 숙제를 내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일곱살 조카에게 동생 몰래 읽어줬던 책이 있다. <무정부주의로 가는 아이들을 위한 안내서-규칙은 깨는 것이다>라는 존 세븐과 재나 크리스티의 그림책으로, 아이들에게 의심하지 않던 규칙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삶을 살라고 말한다. ‘다른 사람처럼 보이지 마라.’ ‘네 주위에 가장 못생긴 괴물을 안아줘라.’ ‘너의 것을 무료로 나눠줘라.’ ‘네가 생각하는 것을 말해라.’ ‘가장 작은 목소리를 들어라.’ 그리고 ‘규칙은 필요 없다. 왕도 필요 없다. 이 책을 찢어 버리고, 네가 원하는 대로 해라.’ 더 늦기 전에 잘못된 규칙 따위는 깨버리고, 새로운 가치와 질서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이다. 쉬운 자습서는 찢어 버리고, 다른 질문을 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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