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1.26 17:50
수정 : 2017.01.26 20:18
조은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예술감독
“악의 평범성, 한나 아렌트가 말했던 상황인 거죠.” 문화체육관광부의 중견관리가 보내온 의미심장한 문자였다.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가 폐지될 위기를 맞고 있다는 지난번 칼럼을 작성하면서 그에게 의견을 물었더랬다. 국비 지원을 전액 삭감한 문체부의 입장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고를 보낼 때까지 아무런 대답을 듣지 못했다. 국정조사와 특검 등으로 문체부 전체가 쑥대밭이 된 상황이었으니 그의 묵묵부답을 쉽사리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신문이 나온 다음날 아침, 칼럼을 스크랩한 화면과 함께 그가 대답을 보내왔다. 윤이상국제음악콩쿠르는 응당 지속되어야 한다는 의견과, 어쩌지 못하는 현실과, 그리고 저 문장, ‘악의 평범성’을 얘기하면서 말이다. 씁쓸하고도 난처한 마음으로 마땅한 대꾸를 찾고 있을 때, ‘다시 특검에 나가봐야 한다’는 그의 마지막 문자가 도착했다.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악의 평범성’이란 문장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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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을 주도한 혐의로 구속된 조윤선 전 문체부 장관이 25일 특검에 소환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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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대통령은 느닷없이 ‘1인 인터넷 방송’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여전히 “블랙리스트는 모르는 일”이며, 이를 폭로한 유진룡 전 문체부 장관을 향해 “장관으로 재직할 때의 말과 퇴임한 후의 말이 달라진 사람”이라고 일갈했다. 그간 자신의 소신을 밝혀온 유 전 장관의 주장과 혼란스레 충돌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대체 이 충돌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3년7개월 전으로 시간을 되돌려 한 대담을 복기해 보도록 하자.
2013년 6월, 한겨레신문은 ‘문화적 가치’를 주제로 도정일 교수와 유진룡 당시 문체부 장관의 대담을 주선했다. 그때만 해도 박근혜 정권의 초창기였다. 유 장관은 대담 내내 문화융성에 대한 기대와 취지를 사뭇 들뜬 어조로 설명한다. 문화융성은 대통령의 취임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내세운 가치이며, 이를 위해 문화재정의 규모를 국내총생산(GDP)의 1.47%에서 2%까지 높이는 것이 대통령의 강한 의지라 했다. 뒤이어 현 상황에선 퍽 신기하다 싶을 언급도 등장한다. 박 대통령은 ‘정치적으로 견해가 다른 사람들과 그런 문화예술인을 다 함께 안고 갈 것’이라고 말했으며, ‘자발적인 문화성공 사례를 지원하되, 정부가 주도해선 안 된다’는 철학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개탄에 빠져 있다는 현재의 대통령에게 형광펜으로 밑줄 그어 보여주고 싶은 문장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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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계 블랙리스트 실체를 폭로한 유진룡 전 문체부 장관이 23일 특검에 참고인 신분으로 출석해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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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문화융성에 대한 기대와 취지를 들뜬 어조로 설명하는 유 장관에게 노학자는 냉철한 조언으로 화답한다. “색깔이 뭐냐, 정부에 비판적이냐 아니냐 같은 근시안적 기준으로 국민을 분할하기 시작하면 지원을 아무리 퍼부어도 ‘문화융성’은 물건너간다.” “정부는 지원을 하되 매사 통제하고 간섭하고 감독하려 들지 말아야 한다. 부당한 배제와 배척, 불필요한 분할에 과감히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관이 통제·지배·군림하는 문화는 ‘나쁜 문화’다. 이건 비민주적이고 반문화적이다. 민의 자율성·자발성·다양성을 존중하고 살려나가야 문화가 융성한다.” 3년7개월 전엔 차마 몰랐을 것이다. 이 조언이 이토록 정확한 예언이 될 줄은. 준엄한 예언 탓일까, 이 노학자의 이름은 이후 블랙리스트에 2번째로 거명되는 영광을 누렸다.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은 독일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책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등장한 개념이다. 그는 유대인 학살과 같은 역사 속 악행이 국가에 순응하며 상부의 명령을 따랐던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자행되었다고 주장했다. 며칠 전, 특검에 출석하던 유 전 장관은 과장 이하 실무자들의 면책을 주장했다. 상부로부터 관련 자료를 철저하게 파괴하라는 지시를 받았는데도, 자료를 숨기고 있다 특검에 제출한 실무진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강요와 양심, ‘영혼 없는 공무원’을 거부했을 비장함 뒤로 그간 벌여왔을 고독한 사투가 절절히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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