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2.02 18:00
수정 : 2017.02.02 20:57
김일송
공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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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주먹쥐고 치삼> 공연 장면. 세우아트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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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에 데었다.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보관케이스에 넣던 중, 열기가 남은 부분을 잘못 쥐어 손가락 끝을 데었다. 한 시간여 얼음찜질을 하자 통증은 사라졌다. 다음날 그 자리에 물집이 생겼다. 원고를 쓰는 지금, 키보드를 칠 때마다 물집을 뜯어낸 약지 끝에서 이물감이 느껴진다. 이 정도 화상도 이러한데, 화마의 상처를 간직한 이들의 고통은 어느 정도일까.
서울 대학로 세우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주먹쥐고 치삼>은 화상환자를 주인공으로 한 연극이다. 주인공은 화재사고를 당해 주먹을 쥘 수 없게 된, 전신 화상을 입은 젊은이 문치삼이다. 뮤지컬배우가 꿈이었지만, 화마는 그의 주먹과 함께 얼굴, 그리고 목소리를 앗아갔다. 피부는 녹아내리고, 성대 절반은 타버렸다. 그나마 목숨을 부지한 게 다행이었을까. 그렇게 함부로 표현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그가 앞으로 감내해야 할 신체적 고통과 감당해야 할 심적, 정신적 고통을 누가 짐작하겠는가. 실제로 시선 공포를 느끼는 화상환자 대다수가 대인기피증을 앓아 집 밖 출입을 삼간다고 한다. 현실이 이러한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뮤지컬배우가 꿈이었던 주인공의 상실감은 어느 정도일까. 짐작할 수조차 없다. 연극은 자신이 쓴 작품을 무대에 올리기 위해 그 스스로 제작자가 되어 뮤지컬배우로 거듭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의 도전은 성공할 수 있을까.
주목할 사실은 이 연극이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점과 그 실존인물이 이 연극을 기획, 제작한 이동근이라는 점이다. 그의 삶은 주인공의 삶보다 더욱 흥미롭다. 주인공처럼 그의 꿈 역시 배우였다. 연기 수업을 위해 방학마다 고향 남해에서 서울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대학 진학은 그리 만만하지 않아 재수마저 실패했다. 그때 아버지가 외상성 뇌지주막하 출혈로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그는 생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분식집, 카페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손재주도 좋고 수완도 있어, 가는 곳마다 인정받았다. 그는 성공을 좇아 제2금융권에 발을 들였고, 이내 제1금융권으로 이직해 부산 시내 고졸 출신의 최연소 팀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부친이 사망하자 돈을 벌 이유가 사라졌다. 잃어버린 삶에 대한 허기가 몰려왔다. 그래서 대학로를 찾았다. 그는 한해 200편 넘게 공연을 보았다. 연극 잡지와 평론집을 탐독했다. 비평워크숍에도 참여했다. 만나고픈 배우 리스트를 만들어 무작정 연락했다. 그 과정에서 공연계 다양한 직군의 사람들과 연을 맺게 되었다. 자연스레 공연기획을 전문으로 하는 사회적 기업 운영이라는 구체적인 꿈을 품게 되었다.
그의 인생이 바뀐 건, 2015년 1월16일이었다. 그가 공연계 첫발을 내디뎠던 축제가 막 끝난, 아직은 축제의 취기가 남아 있던 때였다. 화재사고로 전신 50% 3도 화상을 입었다. 8개월 동안 28차례 수술. 그러나 사고 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사고는 많은 것을 앗아갔다. 얼굴, 목소리, 주먹. 그는 자신이 겪은 체험기를 썼다. <주먹쥐고 치삼>은 그가 쓴 원안을 각색한 연극이다. 배우 데뷔의 꿈까지는 못 이뤘지만, 그를 작가로 데뷔시켜준 작품이다. 작품에는 자신의 체험을 드러낸 자기반영적 부분도 있고, 마치 실제 제작 과정의 에피소드를 살린 듯한 자기반성적 부분도 있다. 기억에 남는 건 스케치북 고백 장면이다. 영화 <러브 액츄얼리> 이후 수많은 스케치북 고백을 보았지만 이만큼 유효적절하게 다룬 예는 보지 못했다. 공연의 완성도?
한 손에 다섯 개의 손가락이 있다. 가장 힘이 센 엄지도 있고, 정확히 메시지를 가리키는 검지도 있다. 매끈하고 날렵한 중지도 있고, 작고 귀여운 소지도 있다. 하지만 지금 필자는 다른 손가락과 달리 혼자서는 제대로 서 있기 어려운 약지를 생각한다. 불에 덴 약지를 생각한다. 화상의 흔적이 지워질 때까지만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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