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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2.23 18:29 수정 : 2017.02.23 21:30

김일송
공연 칼럼니스트

한 남자가 존속살해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는 무죄를 주장했지만 살인에 사용된 흉기, 피 묻은 옷과 손수건 등의 물증들은 그를 살인범으로 지목했다. 무엇보다 치명적이었던 건 살인이 일어나기 전날, 그가 취중에 썼던 편지였다. 살해 의도가 담긴 편지는 결정적 증거가 되었다. 살인행위를 입증할 직접적 증거는 없었으나 정황 등 모든 간접적 증거들이 그를 살인범으로 지목했다. 결국 그는 어떤 판결을 받았을까? 판결은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확인하기를 바란다.

소설은 러시아 문호 도스토옙스키의 유작이다. 금전과 치정, 살인 등 통속적 소재를 통해 인간에 대한 예리한 통찰을 이끌어낸 이 대작의 주요사건은 친부살해와 그 재판 과정이다. 죽은 이는 표도르. 천하의 호색한으로 살아생전 그는 배다른 자식 셋을 두었다. 드미트리와 이반, 알렉세이. 사생아 스메르자코프까지 더하면 넷이다. 피의자로 기소된 이는 장남 드미트리다. 스스로를 ‘정욕의 벌레’라 부를 만큼, 아버지로부터 호색한 기질을 그대로 물려받았던 자식이었다. 사건은 그루셴카라는 여인을 두고 드미트리가 아버지와 연적관계를 형성하면서 시작된다.

연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극단 피악 제공
그러나 이 작품의 주인공은 따로 있다. 도스토옙스키는 서문에서 이 작품의 주인공이 막내 알렉세이라고 밝혔다. 알렉세이는 카라마조프가의 피를 가장 덜 수혈받은 금욕적인 인물이다. 신앙으로 정념을 극복한 그는 사건에서 한 걸음 떨어져 사건을 가장 객관적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이들 못지않게 중요한 인물로 둘째 이반이 있다. 어쩌면 이반은 사상적 차원에서 도스토옙스키의 대리인 역할을 수행하는 인물로 보인다.

이처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는 두드러진 주인공이 따로 없다. 이러한 경향은 인물들의 성격에서도 드러난다. 범속한 작가들은 하나의 성격을 부각해 인물을 유형화하지만,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은 하나의 단어로 수렴되지 않는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마돈나의 이상을 품고 출발했다가도 소돔의 이상으로 끝나고’ 마는 그런 인간들이다. 비열하면서도 고결하고, 퇴폐적이면서도 숭고한, 궁극적으로는 선과 악을 내재한 인물이 그의 주인공이다. 그런데 이들이야말로 인간 아니던가. 선으로 충만한 선의, 악으로 범벅된 악의. 흠결 없는 선인, 인정 없는 악인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이처럼 도스토옙스키는 인물을, 세계를 다층적, 다면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4부 12편의 장대한 원고를 집필했다. 방대한 분량에 압도되어 읽기를 포기한 이들이 꽤 많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3월4일 개막하는 연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이 도움이 될 것이다. 연극은 집필을 막 끝낸 도스토옙스키가 직접 소설을 들려주는 액자식 구성을 취했다. 특히 도스토옙스키가 극 안으로 들어가 등장인물들에게 말을 거는 장면은 원작 소설과는 다른 연극만의 차별화된 특징이다. 이처럼 연극은 자신만의 언어로 카라마조프가의 비극을 압축해 보여준다. 물론, 선택의 과정에서 배제된 이야기도 있다. 그중 ‘한 뿌리의 파’ 우화가 누락된 점은 못내 아쉽다.

‘한 뿌리의 파’는 지옥에 간 노파 이야기다. 선행을 베푼 적 없던 노파가 죽어 지옥의 불구덩이에 빠지게 되자, 그의 수호천사가 나타나 노파가 생전에 했던 유일한 선행을 기억해낸다. 천사가 하느님께 달려가 “노파가 거지 여인에게 파 한 뿌리를 건넨 일이 있다”고 전하자, 하느님이 이렇게 말했다. “그가 그 파를 붙잡고 나올 수 있다면 낙원에 가도 좋다.” 노파는 천사의 도움으로 파를 붙잡고 불구덩이에서 나온다. 하지만 거의 나왔을 즈음, 다른 망자들이 함께 탈출하려 노파에게 매달리자, 노파는 “이건 내 파야, 너희 파가 아니야” 하며 그들을 발로 걷어차기 시작한다. 그 순간 파는 끊어지고, 노파는 다시 불구덩이 속으로 떨어진다.

나는 이 우화에서 박근혜, 최순실이 생각났다. 그들에게도 한 뿌리의 파는 남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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