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3.02 18:28
수정 : 2017.03.02 20:52
박보나
미술가
벽에 나란히 걸린 두 개의 원형 시계가 정확히 같은 시간, 분, 초를 가리키며 움직인다. ‘무제(완벽한 연인들)’(1987-1990)는 쿠바 태생의 미국 남성 작가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가 그의 연인 로스의 투병 기간 동안 만든 작업이다. 두 개의 시계는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어긋나 서로 다른 시간을 가리키게 될 것이고, 둘 중 하나는 결국 먼저 멈추게 될 것이다. 연인의 죽음과 이별에 대한 작가의 절망과 두려움을 엿볼 수 있다. 다른 작업 ‘무제(로스모어 II)’(1991)는 로스가 죽기 직전의 몸무게인 34㎏만큼의 사탕을 갤러리에 쌓아 놓고, 관객이 가져갈 수 있게 설치해 놓은 것이다. 사탕은 같은 무게만큼 계속 다시 채워진다. 로스모어(Rossmore)는 곤잘레스-토레스와 로스가 함께 살던 아파트가 있던 미국 캘리포니아의 실제 거리 이름으로, 문자 그대로 더 많은 로스(more Ross)를 의미한다. 사탕의 포장지는 로스모어 거리의 잔디색으로, 항상 푸른 초록이다. 곤잘레스-토레스의 로스의 죽음에 대한 애도와 절절한 그리움이 드러난다. ‘무제’(1991) 역시, 로스와 함께 자고 일어난 빈 침대의 사진을 거리의 빌보드에 크게 설치한 작업이다. 텅 빈 하얀 침대 위에 눌려 있는 베개와 흐트러진 이불이 로스의 부재와 그로 인한 작가의 깊은 상실감을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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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 <무제>(1991) 서울 중앙일보사 설치 전경.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 더블(플라토 미술관 출판, 2012)에서 발췌한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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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잘레스-토레스의 대부분의 작업은 연인 로스에 대한 것으로, 자전적인 요소를 지니지만 자폐적이지 않다. 둘의 시간은 멈췄지만, 시계는 새롭게 맞춰져 관객의 현재에서 다시 돌아간다. 로스는 죽었지만, 그의 몸을 상징하는 사탕은 관객들 입속에서 녹아 그들 몸의 일부로 흡수된다. 두 연인의 침대는 매번 다른 도시의 빌보드판에서 새로운 풍경을 만든다. 사라지거나 멈추는 작업의 재료들은 죽음의 속성을 닮았지만, 다시 채워지고, 옮겨지고, 새롭게 설치되면서 다시 부활하고 계속 순환한다. 작품의 내용과 형식, 작가의 의도가 잘 맞물려 있어 단단하다. 곤잘레스-토레스의 로스를 향한 깊고 따뜻한 감정은 더 이상 작가 개인의 것에 머물지 않는다. 이들의 사랑은 관객의 현재에서, 개별적 순간으로 경험되고 먹먹히 공감된다.
그런데 곤잘레스-토레스는 동성애자이다. 따라서 그가 그렇게 사랑하고 그리워했던 로스는 동성의 남자 애인이다. 로스는 에이즈로 1991년에 사망했고, 곤잘레스-토레스도 5년 뒤에 죽었다. 작가의 동성애자로서의 정체성은 작업에 정치적인 의미를 추가한다. 이들의 사랑에 대한 공감은 동성애 관계에 대한 이해의 거리를 좁히고, 이들이 받아온 차별과 소외를 함께 고민하게 만든다. 동성애 차별에 대해 직접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지 않기 때문에, 반대 측에 이용당하고 빼앗길 것이 없다. 그래서 더 설득의 가능성을 갖는다.
로스를 향한 곤잘레스-토레스의 시린 그리움 앞에서, 이들의 사랑이 이성 간의 것이 아니라서 거짓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들이 동성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앞에서 느꼈던 공감과 감동이 부정되는가? 그래서 이 연인들은 배척받는 것이 정당하다는 생각이 드는가? 나는 나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둘의 사랑 앞에서 고약한 부정의 말을 할 수 없다. 지금 우리 사회는 길고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고 있다. 어서 이 지겨운 어두움이 끝나고 새로운 정부가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더 환한 세상을 만들 수 있기를 희망한다. 내가 생각하는 환한 세상은 나의 가치관만 옳다고 고집부리며 남의 생각과 사랑을 배척하고 차별하는 세상이 아니라, 남의 다름과 감정도 존중하고 이해할 수 있는 세상이다. 그래서 곤잘레스-토레스와 로스가 봤던 하늘의 따뜻한 빛을 ‘무제(환영幻影)’(1991)와 함께 느낄 수 있는 그런 사회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차별 금지법에 대해 ‘나중에’라는 대답이 아니라, ‘지금’ 그리고 ‘함께’라는 대답을 듣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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