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3.09 18:20
수정 : 2017.03.09 20:02
조은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음악감독
실내악은 벗들의 음악이다. 악기를 연주하며 음악적 대화를 나누다보면 저절로 친밀한 우정이 돋곤 한다. 함께 연주하는 멤버와 사사로이 다투었더라도 음악으로 합을 맞추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일상의 앙금이 사라지는 경험을 실제로 몇 번 겪기도 했다. 연주자 입장에서 실내악은 ‘음악적 얼굴’이 살아 있다는 면에서도 오케스트라와 다르다. 오케스트라는 개별적 정체성을 포기하고 하나의 음악을 위해 서로 동화되어야 하지만, 실내악은 악기의 개성이 생생히 살아 있는 개인주의자들의 조합과 같다. 그러므로 음악학자 시프먼은 실내악을 통해 ‘매우 잘 조직된 유토피아적인 사회’를 꿈꾸기도 했다.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 개인이 양보해야 할 경우에도 실내악에선 그것이 희생이 아니라 기여의 차원이라 주장한다. 생산적이고도 창조적인 타협은 악기 간 개성을 북돋고 공동체의 가치와 응집력을 고조시킬 것이다. 벗들의 음악이며 유토피아적 모둠인 실내악의 매력은 이렇게 웅숭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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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멜니코프-케라스 트리오'. LG 아트센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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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사를 되짚어보면 실내악은 애초 청중보다는 연주자들을 위해 작곡된 음악이었다. 악기의 대중적인 보급과 악보 인쇄술의 발달은 실내악 인구를 확장시켰던 직접적 촉매였다. 덕분에 전문연주자뿐만 아니라 아마추어 음악가들도 ‘내 악기로 직접’ ‘친구들과 함께’ 실내악을 연주하면서 음악을 한층 더 가까이 향유할 수 있었다. 작곡가들은 그리 어렵지 않은 친절한 실내악곡을 출판해 짭짤한 수입을 올렸는데, 이는 생계유지에 큰 보탬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종종, (연주자의 입장에선) 벗들과 나누는 우정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듯 괴팍한 실내악 작품을 만나기도 한다. 베토벤 후기 현악 4중주나 슈만의 피아노 트리오 같은 곡들이 이런 부류인데, 온전히 작곡가의 정신세계에 침잠해 스스로를 향해 쟁투를 벌이듯 불친절한 작품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 쇼플러 같은 학자는 “슈만의 실내악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탁월한 연주자들이 필요하다”며 섣부른 연주자들을 향해 섣불리 나서지 말 것을 에둘러 경고하기도 했다. 연주부터 이렇게 까다로운 전제조건을 극복해야 하는데 감상이라고 만만하겠는가. 연주자들에게나 청중에게나 웬만해선 도전하기 힘든 작품들, 아니 도전했다 하더라도 그 시도에나 의의를 둘 만한 무대를 개인적으론 수차례 겪었다.
그러다 3월7일, 독특한 음악회를 만났다. 한 곡도 제대로 듣기 힘든 슈만의 피아노 트리오 전 작품 세 곡을 한꺼번에 무대에 올린 것이다. 연주자는 ‘파우스트-멜니코프-케라스 트리오’, 이름부터 하나로 통합되기보다는 개개인을 드러냈듯, 구성원 각자가 세계적 솔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특이한 조합이다. 이들은 2년 전부터 슈만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각자 자기 악기에 해당하는 협주곡과 피아노 트리오를 하나씩 커플링하면서 음반을 출반했는데, 기발한 시도와 해석으로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 사람들은 ‘파-멜-케 트리오’라 익살스레 부르며 이름만으로도 신뢰할 수 있는 조합이라 기대했고, 동료 중 누군가는 ‘그렇게 셋이 모이면 반칙 아니냐’ 부러워하기도 했다.
실연을 직접 마주하기 전, 둘 중 하나라 지레짐작했다. 독주자들의 개성이 거칠게 부딪히거나, 아님 그 개성이 아예 마모돼 버리거나. 그렇게나 괴팍한 슈만 피아노 트리오 전곡을 제대로 구현해낼 수 있을까. ‘섣불리’란 빗장으로 마음을 꽁꽁 닫아걸었을 때, 트리오 2번 3악장의 애틋한 악상이 온 세포에 잔잔히 스며와 감정의 소용돌이를 격렬히 일으켰다. 음악적 얼굴이 살아 있는 벗들의 음악이란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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