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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3.16 18:33 수정 : 2017.03.16 20:50

김일송
공연 칼럼니스트

지난 수요일 서울 남산예술센터에서 특별한 행사가 진행되었다. 영국 웨일스국립극장의 <빅 데모크라시 프로젝트>(Big Democracy Project)로, 이는 창작자를 발굴하고자 남산예술센터에서 기획한 ‘서치라이트’(Search Wright) 시리즈의 하나였다. ‘wright’는 오타가 아니다. 극작가라는 의미다.

웨일스국립극장은 런던과 스코틀랜드에 이어 2009년 영국에서 세 번째로 개관한 국립극장이다. 사실 ‘개관’이라는 단어는 부절적하다. ‘극장’이라 불리나 웨일스국립극장은 물리적 공간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무대와 객석으로 이뤄진 건물이 없는, 이른바 ‘극장 없는 국립극장’을 표방한다. 가진 공간이라곤 행정과 사무를 보기 위해 마련한 작은 사무실이 전부다.

남산예술센터 제공
사실 ‘극장 없는 국립극장’은 스코틀랜드국립극장에서 먼저 시도되었다. 극장 운영의 경제적 부담을 덜기 위함이었다. 극장에 지원되는 국민 혈세를 아껴야 한다는 게 근본 취지였다. 더해 국립극장의 사명 중 하나인 국민의 문화향유권 보장도 중요한 이유로 보인다. 관객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그들은 찾아가는 공연을 기획해 전국순회공연을 했다. 이는 웨일스국립극장 또한 공유하는 이념이다. 그들의 무대는 공연장에 한정되지 않았다. 그들은 나이트클럽은 물론 비행기 격납고, 기차역, 버스정류장 등지에서 관객을 만났다. 때로 산과 들, 해변에서 공연을 진행하기도 했다. 극장의 벽을 허문 것이다.

허문 것은 물리적 벽만이 아니다. 그들은 공연의 형식에 있어 관습의 벽을 허물었다. 일반적으로 공연시간 3시간을 넘지 않는 게 공연계 관행이나 마이클 신이 출연했던 연극 <수난극>(The Passion)의 공연시간은 72시간이었다. 또 다른 작품인 <개더링>(The Gathering)은 관객들에게 4시간 동안 6㎞의 산악 하이킹을 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주목할 대목은 주제에 있어 통념의 벽을 허문 사실이다. 소통을 중시하는 이들은 작품의 주제 선정 과정에서 지역주민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했다. 최근 이들은 <빅 데모크라시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지역 현안과제에 대한 다양한 계층의 의견을 받았다. 경제문제, 주거문제, 복지문제, 보육문제, 교육문제는 물론 인류평화와 세계경제 등 다양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들은 이렇게 수합한 의견 중 투표를 통해 채택된 하나의 주제를 놓고 지역주민들과 함께 작품을 제작한다. 국립극장이 정부 정책에 반하는 작품을 제작해 무대에 올리는 셈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 앞에 산적한 국가적 과제도 그들 못지않다. 당장 떠오르는 것만도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사드 배치 철회, 한-일 위안부 합의 파기, 국정역사교과서 철회, 18세 투표권 보장, 경제·사회 양극화, 재벌개혁, 비정규직 문제, 청년실업 해소, 예술 검열과 언론탄압 해소 등 여럿이다. 이뿐인가. 여성비하, 소수자 혐오, 장애인 차별, 갑질문화 등 일상의, 인식의 문제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지난 몇 년 국공립극장이나 공공단체에서 이런 사회적 의제를 주제로 한 공연을 만나기는 어려웠다. 영국 비평가 마이클 빌링턴은 ‘21세기 국립극장은 현재를 논할 때만 생명력을 가질 수 있’고, ‘국가 정체성의 한 부분을 이루는 정치적 갈등과 사회적 긴장을 고민하는 극장으로 기능할 때만이 비로소 그 존재를 정당화할 수 있다’고 했다.

지난겨울, 이러한 기능을 광화문의 광장극장 블랙텐트가 대신했다. 앞서 인용했던 비평가의 말을 따르자면, 우리에게는 광장극장 블랙텐트가 국립극장이었다. 그 광장극장 블랙텐트가 내일 해체된다. 개인적 바람이야 부패정권과 이에 맞서는 예술가들의 저항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존치되는 것이지만, 이제 그 소명을 다하고 소멸될 예정이다. 내일 유형의 극장은 사라진다. 그러나 그들이 시민들의 가슴에 세운 무형의 극장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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