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7.03.23 18:25 수정 : 2017.03.24 17:34

박보나
미술가

내가 델피나 엔트레카날레스 여사를 처음 만난 건 2015년 영국 런던의 델피나 재단 레지던시-예술가들에게 작업 공간과 숙소 등을 제공해주며 창작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에서였다. 참가 첫날부터 작가들의 작업 계획 발표가 있었고, 그 자리에 재단 설립자인 델피나도 참석했다. 아침부터 하루 종일 이어지는 밀도 있는 발표를 듣는 것이 꽤나 고됐는데도, 88살이나 된 백발의 작은 할머니 델피나는 흐트러짐 하나 없는 자세로 꼿꼿이 앉아서 모두의 발표를 끝까지 경청했다. 작업이 재밌다고 웃음을 터트리기도 하고 이런저런 질문도 하면서 발표의 분위기를 부드럽고 유쾌하게 만드는 것도 델피나의 역할이었다. 게다가 일정이 끝난 뒤 모두의 의자를 손수 정리하기까지 했다. 델피나의 그런 겸손하고 친근한 태도가 한국의 설립자나 행정적인 책임자들의 권위적이고 형식적인 것과는 사뭇 달라서 상당히 인상 깊었던 기억이 있다.

델피나 엔트레카날레스. 크리스타 홀카, 델피나 재단 제공
델피나 엔트레카날레스는 스페인 태생으로, 1946년에 영국으로 건너왔다. 델피나가 스튜디오 재단을 런던에 처음 세운 것은 1988년으로, 2006년 리노베이션을 위해 잠시 문을 닫을 때까지 20년 가까이 34개의 스튜디오와, 전시장, 숙소 등으로 구성된 공간을 운영했다. 2007년 델피나 재단으로 재개관한 이후 현재까지 중동과 북아프리카 작가들을 좀 더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방향으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지금까지 600여명의 작가들이 델피나 재단의 지원을 받았는데, 이후에 후원 작가들의 일부가 영국의 가장 권위 있는 미술상인 터너 프라이즈를 받았으며, 많은 작가가 여전히 국제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2015년 재단 기금 마련 전시에서는, 샨탈 조페를 포함한 18명의 델피나 재단 후원 작가들이 작업을 기꺼이 기증하기도 했다. 샨탈은 20여년 전 배가 너무 고플 때 델피나가 선뜻 내준 50파운드를 고마운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작가로, 현재 샨탈의 그림 한 점의 가격은 4만파운드(한화로 5600만원가량)에 이른다. 델피나는 미술 작가 후원은 스스로 좋아서 하는 일일 뿐 돈이나 명예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나는 미술품을 수집하지 않고 작가를 수집한다’는 델피나의 호방한 표현에서 그녀의 예술과 문화에 대한 사심 없는 애정과 길고 깊은 시각이 드러난다.

지난 6일 홍라희 삼성미술관 관장이 리움과 호암미술관 관장직에서 사퇴했다. 이건희 회장이 병석에 있고,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마저 구속된 상황에서, 더 이상 미술관을 운영할 상태가 아닐 것이라는 추측도 있지만, 내부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소문도 있다. 삼성 측의 이러한 결정으로 이미 예정되어 있던 전시들이 취소되었고, 앞으로도 당분간 규모 있는 전시 유치나 젊은 작가 후원 전시 등은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의 미술관 운영 파행이 미술 분야에 가져올 이러한 실질적 파장도 아쉽지만, 삼성의 미술에 대한 태도가 더 안타깝다. 정치 스캔들과 가족 내분이라는 드라마에서 미술은 거추장스럽다고 떼어 버리는 액세서리 정도로 취급받는 것 같아서 속상하다.

델피나가 미술 후원자로 존경을 받는 이유는 쉽지 않은 여건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작가들을 후원해 왔기 때문이며, 그 후원의 목적이 사익이 아닌 미술과 문화에 대한 열정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델피나에게 무릎을 꿇고 존경을 표시하고 싶다는 작가에게 델피나는 ‘무릎을 꿇는 것을 보기보다 우뚝 서서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을 보고 싶다’고 답한다. 델피나 재단의 동화와 비교되는 삼성미술관의 불편한 드라마에서 미술에 대한 애정이나 문화에 대한 미래적, 장기적 관점은 찾아볼 수 없다. 삼성미술관 운영을 둘러싼 갈등과 파행에서 정작 미술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몹시 아쉽다.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문화 현장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