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4.20 18:07
수정 : 2017.04.20 20:44
조은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예술감독
이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에서 음악적으로 각별한 순간은 주역이 부르는 화려한 아리아가 아니다. 그보단 민중의 삶과 고통을 노래하는 중창과 합창이다. 군중들은 오페라가 진행되는 동안 시종일관 등퇴장을 반복한다. 급박하게 요동치는 정치적 혼란 속에서 무리를 이루었다가 흩어지고, 떨어졌다 다시 뭉쳐 강력한 응집력을 토해내는 것이다. 권력의 지배에 고통받는 민중의 아우성은 성악적 발성으로 다듬지 않은 거친 고함소리로 연출되기도 한다. 이렇듯 합창과 중창을 집중적으로 배치한 작곡가 무소륵스키의 철학은 그가 남겨놓은 작곡 당시의 메모에서 발견할 수 있다. “지금 작곡하고 있는 것은 민중의 장면이다. 민중은 위대한 인격체다. 나는 밤낮으로 민중을 보고 민중을 생각하고 민중을 노래한다. 민중만이 거침없이 위대하고 꾸밈없이 독보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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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오페라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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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을 주역으로 끌어올린 데 그치지 않고 이 오페라는 권력자의 심리 역시 심층적으로 파고든다. 권력 이면의 악행, 그로 인한 양심의 가책과 심적 고통이 입체적으로 구현되는 것이다. 8살 황태자가 대낮 왕궁의 뜰에서 목이 잘린 채 발견된다. 황실 조사위원회는 이 의문의 죽음에 대해 간질 발작을 일으킨 황태자가 우연히 칼 위로 넘어진 탓이라 발표하지만 민중은 이를 믿지 않는다. 그보단 어린 황태자 대신 섭정을 맡고 있던 보리스 고두노프의 소행이라 모두들 짐작한다. 이때 권력의 잔혹성은 부패한 제국의 부조리를 고발하려는 민중의 목소리와 정면충돌한다. “그때 분명 그를 죽였느냐?” “죽음이 이 땅을 짓밟고 있다. 고통받는 민중이 나를 저주한다.” “내 머리는 미쳐버리고 눈앞에는 피투성이 아이가 보인다.”라고 노래하는 권력자의 절규는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를 연상시킨다.
작곡가 무소륵스키는 정규 음악교육에서 멀찍이 비켜나 있었다. 우체국의 말단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독학으로 작곡을 공부한 ‘딜레탕트’ 작곡가였던 것. 덕분에 그의 음악적 영감은 제도권 음악교육으로 마모되지 않을 수 있었는데, 세련되지 않은 작곡기법이라 하더라도 그만큼 거칠고 원시적인 생명력을 발화할 수 있었다. 민족주의를 이끌었던 ‘러시아 5인조’의 당당한 일원답게 이 오페라에서도 러시아의 독특한 선법을 과감히 차용한다. 특히 웅장한 화음이 울려 퍼지는 대관식 장면에서 작곡가는 딸림화음에서 으뜸화음으로 해결(Ⅴ-Ⅰ)되는 뻔한 동선을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그 대신 청각적 예측의 허를 찌르는 거짓마침(Ⅴ-Ⅵ)을 빈번히 등장시킨다.
이 오페라의 주역 보리스 고두노프는 남성 가수 중에서도 가장 낮은 음역인 베이스가 부른다. 보리스뿐만 아니라 주요 배역들(니키티치, 바를람)까지 베이스가 맡은 덕택에 테너가 주도하는 여타의 오페라에 비하면 훨씬 더 묵직한 음조가 특징적이다. 작곡가는 육중한 음성을 낭독하는 듯한 창법으로 다시 날렵하게 균형을 맞추는데, 러시아어 특유의 리듬이 깃든 이 낭음조의 노래는 아리아라기보다는 모놀로그에 가깝다. 보리스가 황제에 오른 후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하는 ‘나의 영혼은 슬프다’와 민중의 반란에 공포를 느끼면서도 일부러 외면하는 ‘나는 최고의 권력을 쥐었다’와 같은 장면은 이런 강박적 독백을 음악적으로 훌륭히 구현한 순간이다.
국립오페라단이 국내 최초로 제작해 올리는 이 오페라는 16세기 말에 일어난 러시아의 역사를 다루고 있지만, 정치적 역동을 헤쳐나가는 지금 우리의 실상과도 밀접히 잇닿아 있다. 역사적인 대선을 앞둔 이때, 민중과 권력자를 다룬 각별한 오페라가 무대에 오른 것이다. 지난 정권의 권력자들을 줄줄이 법의 심판대로 퇴장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오롯이 민중의 힘 덕택이었다. 극중 수도승 피멘이 토로하는 역사적 진실을 향한 집념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진실을 기록해야 한다. 현실이 잔인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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