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5.04 18:32
수정 : 2017.05.04 21:13
박보나
미술가
2015년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는 큰 비난을 받는다. 터키의 해변에서 시체로 발견된 세 살짜리 시리아 난민 어린이, 쿠르디의 사진을 1면에 싣고, 비싼 가방을 껴안고 같은 자세로 여자 모델이 해변에 시체처럼 누워 있는 구치의 광고 사진을 마지막 면에 실음으로써, 신문을 펼쳤을 때 두 이미지가 나란히 보이도록 배치했기 때문이다. 전세계적으로 슬픔과 분노를 불러일으켰던 쿠르디의 죽음이 상품 판매 전략으로 연결되었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르몽드>의 이러한 무심한, 혹은 무자비한 편집은 수전 손택이 <타인의 고통>에서 지적한 것처럼, 다른 사람의 고통이 스펙터클한 구경거리가 되어버린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리고 이 낯 뜨겁고, 불편한 현실의 민낯은 우리가 남의 고통에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이 어떻게, 얼마나 가능한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서울 구기동 스페이스풀에서 열리고 있는 조은지의 개인전 ‘열풍’에서, 작가는 캄보디아와 인도네시아 학살 사건을 다룬 작업을 선보인다. 이 전시에는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수북이 쌓인 킬링필드의 해골 더미나, 늙고 고된 얼굴의 생존자가 잔인했던 학살의 날을 증언하는 익숙한 장면이 등장하지 않는다. 비디오 작업 <수행하는 사람들>(2017)에서, 학살에서 살아남은 피해자들의 인터뷰는 낡은 옷깃이나 깊은 눈빛, 앙상한 손짓 등의 움직임으로만 남아, 인터뷰를 해석한 인도네시아의 젊은 마임 예술가들의 격렬한 몸짓과 교차된다. 그리고 피해자들의 목소리는 햄릿의 대사를 개사한 ‘죽느냐 수행하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위에 한국어 내레이션으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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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지 <수행하는 사람들>, 2017, 2채널 비디오, 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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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은지의 작업에는 잔혹한 이미지라든가, 잔인한 폭력에 대한 극적인 증언들이 생략되어 있다. 따라서 관객은 화면 속 피해자들에 대해 의례적으로 갖게 되는 일방적인 연민의 감정을 느낄 수 없다. 손택에 따르면, 타인을 불쌍하게 느끼는 연민의 감정은 그 고통이 내가 겪은 일이 아니라는 안도감과, 내 잘못은 아니라는 무책임함과,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는 무기력함으로 연결된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나와 분리시킨 채, 안됐다고 여기는 태도는 그들의 고통을 관조적으로 소비해 버리는 것과 같다. 그것은 세 살배기 어린이의 시체를 보고 안타까움과 슬픔을 느낀 후, 신문을 몇 장 더 넘겨, 그 아이를 연상시키는 광고를 보며 죄책감 없이 쇼핑 계획을 세우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충격은 면역이 되고, 마음은 딱딱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조은지는 피해자의 고통을 전시하지 않는다. 대신, 비극의 순간과 감정을 젊은 댄서들의 움직임으로 해석하고, 거기에 삶의 수행에 대한 언어를 입힌다. 함축적이고 시적인 표현으로 그들의 아픔을 작가의 감정 안으로 가지고 들어온다. 그리고 관객은 작가가 연결시켜 놓은 이 감정적 고리를 통해 자신들의 경험과 그들의 경험을 겹쳐 놓게 된다. 국가 폭력과 권력의 피해자라는 연대로서, 5월의 여기 광주를 생각하게 되고, 세월호의 침몰로 잃어버린 우리의 아이들을 생각하게 된다. 타인의 고통은 내가 밟고 있는 땅에 새겨진 죽음들과, 그 뒤에 이어지는 삶의 수행에 대한 공감과 사유로 확장된다.
시리아 어린이의 죽음도, 캄보디아나 인도네시아에서의 수백만 명의 죽음도, 우리가 그 고통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 조은지의 작업에서처럼, 다른 이들의 아픔을 나의 경험과 감정으로 연결시켜 교감하려 하는 시도는 중요하다. 서로에 대한 이해와 연대는 각자의 삶을 지속 가능하게 해줄 지지대가 되기 때문이다. 조은지의 내레이션처럼, 삶을 ‘수행한다는 것’은 ‘앞서 쉬었던 숨을 잇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교감과 연대는 서로의 뜨거운 숨을 들이마시고, 또 내뱉음으로써 삶을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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