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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6.29 18:18 수정 : 2017.06.29 20:54

김일송
공연 칼럼니스트

“거울이 하나 있었답니다. 길이는 아버지 키만 하고 폭은 아버지 어깨보다 조금 넓은 정도의 거울. (…) 아버지는 나가서 밥을 사먹을 돈이 없어서 간단한 음식을 방에서 해 드셨어요. 아버지는 작은 책상에 앉아 거울을 마주보며 식사를 하신 거죠. (…) 그렇게 몇 달이 흘렀지요.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말았어요. 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것. 아니 어쩌면 항상 거기에 있었는데 못 봤던, 그 어떤 것을 언뜻 보신 거예요. 거울에서 뭔가를 본 거죠. 아버지는 그것을 본 이후로 변하셨어요. 아버지의 모든 것이 송두리째 변했어요.”

아버지가 거울에서 본 것은 말미에 밝히겠다. 섬뜩한 스릴러를 연상할 수 있지만 <가지>는 그런 장르의 연극은 아니다. 비유하면 일본영화 <심야식당>이나 <카모메식당>으로 설명할 수 있겠다. 짐작하듯 연극은 음식을 매개로 소박한 한 끼의 감동을 이야기한다.

연극 <가지>. 국립극단 제공
감동을 요리하는 요리사는 재미동포 2세 레이다. 그에게는 간 경변 말기로 죽음을 앞둔 아버지가 있다. 연극은 그가 아버지를 병원에서 집으로 모시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는 평생 왕래 한번 없던 한국의 작은아버지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 한달음에 날아온 작은아버지는 레이에게 자라 한 마리를 건넨다. 보양식인 자라탕을 먹으면 병이 나으리란 기대에서. 그러나 레이는 요리하길 거부한다. 평소 아버지가 자신의 요리를 좋아하지 않았고, 자신이 요리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던 것을 레이가 모르지 않기 때문이다. 레이는 자라탕을 만들게 될까? 그래서 아버지가 완쾌될까?

자라탕은, 그러나 이 연극의 메인 요리가 아니다. 음식을 매개로 한 작품답게 작품에는 실제로 다양한 음식과 식재료가 언급된다. 처음과 끝에 등장하는 여성의 대사가 특히 그렇다. 식도락가 남편과 함께 맛집 투어를 다녔다는 여성의 대사에는 수비드와 분자요리, 무살균 우유로 만든 치즈, 최고의 프로슈토 등 어지간한 미식가가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 식재료와 요리법이 등장한다. 하지만 원작자 줄리아 조가 공을 들인 건 사이드 요리 쪽이다.

맛집을 찾아 전세계를 전전한 이 여성은 아버지가 생전에 만들어주었던 파스트라미 샌드위치를 최고의 음식이라 말한다. 레이의 아버지는 젊은 시절 친구들과 산에 놀러 가 불 피워 만들었던 음식들이 생에 가장 맛있던 음식이라 말한다. 난민 출신의 호스피스는 내전이 일어나 도망치기 전 고향에서 길러 먹었던 채소를 최상의 음식이었다고 말한다. 심지어 코넬리아는 음식이랄 수도 없는 뽕나무 열매 하나로 레이와 사랑에 빠진다. 그들이 씹었던 것은 요리가 아닌 추억 아니었을까. 어쨌거나 그들에게 위로를 주는 건 담백하고 소박한 한 끼다.

음식을 매개로 한 위로에 지면의 대부분을 할애했지만, 사실 이는 반쪽짜리 설명이다. 나머지 반은 죽음이라는 사건을 중심으로 한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자세와 삶을 살아가는 자세. 글머리에서 던졌던 질문에 대한 답이 이에 대한 근거가 될 수 있겠다. 맨 앞에 인용했던 대사에 이어지는 레이의 대사다. “아버지가 보셨던 그것을, 저도 보고 말았습니다. 늘 그곳에 있던 것을. 저는 저 자신의 죽음을 봤어요. 저 자신이 나무 관 안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수십년 전에 아버지가 거울을 통해 자신이 나무 관에 누워 있는 걸 봤던 것처럼 말이죠. (…) 그게 아마도 아버지가 저한테 하고 싶으셨던 말씀인 것 같아요. 넌 언제나 이미 죽었다. 그러니까 왜 살지 않니?”

밑줄 긋고픈 연극이 있다. <가지>가 그렇다. 작가의 의도를 살려 연출은 기교 부리지 않고 원작을 요리했다. 배우들은 담백한 연기로 원작의 깊은 맛을 우려내었다. 그리고 필자가 미맹이라 미처 발견하지 못한 더 많은 맛이 있을 것이다. 직접 맛보시면 아실 터. 연극은 서울 서계동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7월2일까지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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