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8.10 18:17
수정 : 2017.08.10 20:30
김일송
공연 칼럼니스트
사람들이 자주 하는 오해가 있다. 뒤틀린 성적 판타지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사디즘(Sadism)과 마조히즘(Masochism)에 대한 오해다. 줄여 사도마조히즘(SM)이라 부르듯, 사디즘과 마조히즘에 대해 하나의 기원을 가진 것으로 착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가학 성향을 지칭할 때 쓰이는 사디즘은 프랑스 작가 사드 후작으로부터 기원하였다. 본명은 도나시앵 알퐁스 프랑수아 드 사드. 1740년 태어나 1814년 사망한 그의 대표작으로는 <소돔 120일>이 있다. 소설은 사드가 사망하고 90년이 지난 1904년 미완의 상태로 발굴되었는데, 소설이 유명해진 것은 1975년 이탈리아 영화감독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가 영화화하면서부터다. 그런가 하면 피학 성향을 가리킬 때 쓰이는 마조히즘은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에 의해 비롯되었다. 그는 사드보다 한 세기 늦은 1836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다. 이처럼 사드와 자허마조흐는 생몰년도나 연고 등 모든 면에서 아무 인연을 갖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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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비너스 인 퍼>. 달컴퍼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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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이 변태성욕을 나눈 연인처럼 엮이게 된 건 독일 출신의 정신과 전문의 리하르트 폰 크라프트에빙 때문이었다. 에빙은 1886년 자신의 책 <정신 병리학적 성욕>에서 생면부지의 사드와 자허마조흐를 묶어 변태성욕을 정의하였다. 자허마조흐가 크라프트에빙에 의해 피학성욕의 대명사로 지목된 건 그의 소설 <비너스 인 퍼> 때문이었다. 소설은 자허마조흐의 피학적 성향을 극명하게 드러낸 작품으로, 미국 극작가 데이비드 아이브스는 2010년 이 소설을 모티브로 한 동명의 연극을 오프브로드웨이에서 초연하였다. 이후 2013년 폴란드 감독 로만 폴란스키도 이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영화를 제작했는데, 이 작품이 지금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공연 중이다.
연극은 자허마조흐의 소설을 각색해 무대에 올리려는 연출가와 이에 출연하려는 배우의 2인극이다. 연극은 이처럼 사도마조히즘을 전방에 내세우지만, 사도마조히즘은 작가의, 주인공들의 전략적 유인책에 불과하다. 배경은 오디션장. 오디션을 마치고 귀가하려는 연출가 토마스 앞에 매춘부 차림의 벤다가 등장해 오디션을 보겠다며 막무가내 외투를 벗는다. 연기를 보일 기회를 달라는 배우와 이를 거절하는 연출가. 작품 초반은 이 두 사람의 실랑이로 전개된다. 여기서 권력관계는 분명해 보인다. 선택을 받으려는 존재인 배우는 약자일밖에. 현실에서도 이는 통상적 관계다.
공연은 토마스의 신작 장면 연습을 하는 극중극과 극중 현실을 넘나드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극중극에서 벤다는 사디스트를 연기하고 토마스는 마조히스트를 연기한다. 벤다는 명령하고 토마스는 순종한다. 그리고 연습이 진행되면서 극중극과 극중 현실의 경계선이 무너져버린다. 동시에 둘의 권력구도에도 변화가 생긴다. 바로 그 지각변동이 <비너스 인 퍼>를 전개시키는 추동력이다. 권력은 어떻게 전복되는가? 캐스팅 권한을 가진 연출가는 무슨 빌미를 잡혀 무명배우에게 휘둘리게 되는가? 그래서 이 무명배우는 결국 작품에 출연하게 될 것인가?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벤다가 작품에 출연을 하기 위해 오디션에 지원한 게 아니라는 게 밝혀지는데, 벤다가 토마스로부터 빼앗고자 했던 건 결국 무엇일까?
이번 공연 <비너스 인 퍼>에서 피학 성향의 토마스 역으로는 지현준, 이도엽 두 배우가 출연한다. 가학 성향의 벤다 역으로는 방진의, 이경미가 출연한다. 연출은 뮤지컬 <스프링 어웨이크닝> 등을 연출했던 김민정이 맡았다. 한국적 상황을 의식한 탓이었을까? 공연은 영화와 달리 표현의 수위를 다소 낮춘 듯한 인상을 준다. 인물에도 변화가 생겼다. 영화 속 벤다가 퇴폐적 관능미로 토마스를 제압한다면, 무대 위 벤다는 애교로 토마스를 유혹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성욕을 통해 권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연극 <비너스 인 퍼>는 8월27일까지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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