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8.17 18:05
수정 : 2017.08.17 20:40
박보나
미술가
떠돌이 개, ‘어쭈’를 데려다 키운 지 벌써 18년째다. 그만큼 동물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었다. 이 자신감은 4년 전, 감기에 걸려 상품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동물병원에서 죽으라고 이불을 덮어 놨던 터키시 앙고라 고양이를 입양하면서 잠시 흔들렸다. 고양이와 살아본 적이 없던 나는, 고양이가 야행성인 것도 몰랐고, 맨살만 보면 좁쌀만한 이빨로 야무지게 공격하는 이유도 알 수 없었다. 손바닥만한 고양이의 공격이 무서워서, 어쭈랑 이불 속에 숨어 고민을 했더랬다.
쟤는 내가 주인인 걸 알까? 그보다 사실, 내가 자신이 없었다. 개성 있게 생긴 잡종견 어쭈와 달리, 품종묘인 새 고양이의 얼굴이 영 구분이 되지 않았다. 얘가 다른 고양이들과 섞여 있으면 알아볼 자신이 없었다. 새로 들인 고양이는 인터넷에서 본 다른 터키시 앙고라처럼, 그냥 하얀색 고양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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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남, <1,025: 사람과 사람 없이>, 2008, 이상원 미술관. 작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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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이 지난 지금은 그때의 걱정이 우습게 느껴진다. 흰 고양이 100마리가 같은 자세로 횡과 열을 맞추어 앉아 있어도, 이제 나는 내 고양이 ‘쭈리’를 골라낼 수 있다. 어릴 때 먹인 항생제 때문에 이빨이 좀 누렇고, 지붕 위에 올라갔다가 생긴 생채기의 흉터도 왼쪽 눈가에 희미하게 남아 있다. 점과 흉터를 일일이 짚어 보지 않더라도,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다. 내가 쭈리를 알아보듯이, 쭈리도 눈에 나를 담고 있으니까.
영화 <옥자>에서 주인공 ‘미자’와 슈퍼돼지 ‘옥자’도, 나와 쭈리처럼 서로를 항상 알아본다. 옥자는 전화기 너머의 미자 목소리를 바로 알아듣고, 미자는 수백마리의 비슷한 슈퍼돼지 사이에서 옥자를 어렵지 않게 찾아낸다.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추억을 공유하며, 감정을 교환하는 것은 아주 특별한 일이다. 동물과의 관계도 별반 다르지 않다. 동물과의 교감은 이들을 그냥 고양이나 그냥 슈퍼돼지가 아닌, ‘나의 쭈리’와 ‘미자의 옥자’라는 소중한 개인적 경험으로 만든다.
윤석남 작가의 <1,025: 사람과 사람 없이>(2008)는 혼자서 1025마리의 유기견을 돌보는 할머니와 유기견들을, 작가가 5년에 걸쳐 나무로 하나하나 깎고, 채색한 작업이다. 1000개가 넘는 개체가 각각 다른 모습과 자세를 하고 있다. 한 마리씩 나무를 자르고 칠하기를 반복하고, 얼굴을 들여다보고, 다듬으며, 작가가 유기견 조각들과 함께 보낸 시간이 이들의 각기 다른 모습 속에 나타난다. 나무가 가진 투박하고 따뜻한 질감과 유기견에 대한 작가의 연민 어린 마음이 어우러져, 모든 개들이 다정한 에너지로 살아 있다. 유기견 1025마리 각각이, 작가의 애정과 교감을 눈에 담은 채, 평화로운 숲을 이룬다.
늦은 나이에 화가로 데뷔한 윤석남 작가는, 육 남매를 홀로 키운 자신의 어머니와 여성, 그리고 자연에 대한 작업을 해왔다. 유기견 조각에서도 여성과 생명에 대한 작가의 일관된 애정과 관심이 드러난다. 가부장제 안에서 희생적으로 살아온 여성들과 버림받은 동물들에 대한 그녀의 작업은, 억압받는 약자를 편들고 모든 생명의 가치를 똑같이 보듬는 생태여성주의적 관점으로 읽을 수 있다.
공장에 맡겨 쉽게 주물을 뜨지 않고 손으로 하나씩 나무를 깎아 유기견을 조각하는 것도, 식용 슈퍼돼지에 감정이입을 하는 것도, 상품으로 가치가 없어 버려진 고양이랑 가족으로 사는 것도, 실용적이고 이성적인 관점에서는 불필요한 감상주의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을 황폐하게 하고, 동물과 인간 모두를 외롭게 만든 것이 바로, 자연을 문명의 대척점에 놓고 정복의 대상으로 여겼던 이 인간중심의 이성주의가 아니었던가. 다른 생명을 수단이 아닌 교감의 대상으로 경험하고 이들과 같이 어울려 사는 것은 이 지구에서 지속적인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이 된다. 인간이 덜 외로워질 수 있는 방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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