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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10.12 19:54 수정 : 2017.10.12 20:26

조은아
피아니스트,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2013년 피아니스트 라파우 블레하치의 내한공연이 갑작스레 무산되었다. 당시 악명을 떨치던 신종 플루에 감염된 탓이었다. 블레하치의 연주를 고대하던 한국 청중은 좌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듯 4년 동안 꾹꾹 눌러 담았던 그 갈증이 드디어 내일(14일) 해갈될 예정이다. 쇼팽 콩쿠르 우승에 연연하지 않고 음악적 깊이에 신중을 더해 온 블레하치의 독주회가 예술의전당에서 펼쳐진다. 세계 음악계를 매료시킨 블레하치 특유의 피아니즘, 그 내면의 서정과 음악적 자의식을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피아니스트 라파우 블레하치. 마르코 보르그레베 제공

폴란드의 피아니스트 라파우 블레하치는 2005년에 열린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를 우승하고도, 각 라운드의 특별상 4개(마주르카, 폴로네즈, 협주곡, 소나타)를 한꺼번에 휩쓴 최초의 연주자였다. 특히 한국 청중들의 뜨거운 관심을 한 몸에 받았는데, 당시 쇼팽 콩쿠르에서 우리나라 연주자들(손열음, 임동민, 임동혁)이 사상 최초로 최종 결선에 진출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밤을 꼬박 지새우며 콩쿠르 실황을 생중계로 지켜보았다. 임동민, 임동혁 형제는 소수점 둘째 자리까지 똑같은 동점으로 공동 3위에 올랐다. 폴란드 출신의 블레하치가 우승자로 호명되던 순간, 형제를 응원했던 한국의 음악 팬들은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블레하치가 홈그라운드의 혜택을 입었다 마냥 폄훼할 수도 없었다. 심사위원 중 누군가의 언급처럼 “9명의 경쟁자와 1명의 예술가”의 연주였을 정도로 블레하치의 음악성에 깊게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무산됐던 4년 전 내한공연처럼 이번 프로그램도 바흐, 베토벤, 쇼팽의 작품으로 구성되었다. 청중의 기대를 가장 사로잡고 있는 순서는 아무래도 2부에 연주될 쇼팽일 것이다. 2013년 무산된 프로그램이었던 녹턴, 마주르카, 스케르초 대신 이번 공연에선 녹턴, 소나타, 환상곡을 연주한다. 규모와 깊이 모두 진화된 프로그램이 아닐 수 없다. 폴란드 출신으로서 쇼팽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묻는 질문에 블레하치는 “나의 심장에 가장 가까운 작곡가”라 대답했다. 반면 쇼팽 일변도에 자신의 몰입을 가두고 싶진 않다는 소망도 피력했다. 쇼팽 콩쿠르 이후 세계 각지의 청중들은 무조건 쇼팽부터 듣기를 요구했지만, 블레하치는 다른 스타일의 작곡가 작품도 꾸준히 선곡해 왔다는 것이다. 특히 2012년 음반으로 녹음한 드뷔시 작품들은 쇼팽 연주의 톤 컬러와 섬세한 음향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자평했다.

이번 공연은 바흐로 시작한다. “바흐의 음악이 쇼팽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고 싶었다”는 그의 인터뷰처럼 프로그램의 맥락을 염두에 둔 선택이다. 블레하치는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을 즐겨 협연한다. 특히 4번의 2악장이 자신의 내밀한 인성과 가깝다고 털어놓았다. 반면 5번 협주곡 황제는 정서적 거리가 있다는 흥미로운 대답도 들려주었다. 내면의 깊이와는 별도로 블레하치는 왼손과 오른손을 각각 다른 피아니스트가 전력을 다해 연주하는 것처럼 압도적 테크닉을 갖고 있다. 적확한 타건은 표현의 과잉을 여과하는 절제로 치열히 단련되었는데, 그러면서도 충실히 토로하는 감정 표현이 매혹적이다.

콩쿠르 우승 이후 블레하치는 화려한 외양에 유혹당하지 않고 내면의 성숙을 굳건히 지켜왔다. 또래의 연주자들에게서 찾기 쉬운 감정의 과잉이나 인위적 해석으로부터 초연한 경지에 도달한 것이다. 이렇듯 자연스러운 깊이가 깃든 거장다운 연주는 전세계 클래식 팬들을 매료시켰다. 그의 신중한 행보는 폴란드 코페르니쿠스대학교의 박사과정까지 학업을 연장시킨 데에서도 가늠할 수 있다. 전공은 놀랍게도 미학과 음악철학이다. 겸허한 동시에 깊이 있는 블레하치의 감수성은 자연의 영혼이 담겨 숭고한 음악세계를 펼쳐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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