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10.19 18:15
수정 : 2017.10.19 18:58
김일송
공연 칼럼니스트
연극의 4대 요소는 배우, 희곡, 관객, 무대다. 3대 요소는 배우, 희곡, 관객이다. 아무도 정의 내린 바 없지만, ‘연극의 2대 요소’를 꼽으면 무엇을 빼야 할까? 배우? 희곡? 관객? 무엇을 빼더라도, 배우는 남을 것이다. 그런데 연극 <십년만 부탁합니다>에는 배우가 없다. 배우가 없는 연극이라니. 그것도 연극이라 부를 수 있을까?
|
연극 <십년만 부탁합니다> 남산예술센터 ⓒ조현우
|
<십년만 부탁합니다>는 새로운 개념의 공연 형식을 고민하는 남산예술센터가 선보이는 연극으로, 설치미술작가 이주요와 광주비엔날레 큐레이터로 알려진 김현진이 공동 연출한 작품이다. 제목대로 연극은 10년 전부터 준비되었던 장기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시작은 전시였다. 자신의 작품(오브제)들을 보관할 마땅한 장소를 찾지 못한 이주요는 오브제들을 관리해줄 위탁자들을 찾기 위해 2007년 전시 ‘십년만 부탁합니다’를 준비했다. 전시를 통해 위탁자들을 찾은 이주요는 그들에게 자신의 오브제들을 맡겼고 10년을 앞둔 지난해, 다시 오브제들을 돌려받았다. 연극 <십년만 부탁합니다>의 주인공들은 바로 그 오브제들이다.
그중에는 의자처럼 단단한 오브제도 있지만, 스티로폼처럼 잘 부서지는 연약한 오브제도 있다. 거대한 설치작품부터 아주 작은 비닐까지, 크기도 소재도 다양한 오브제들이 지난 10년의 세월을 넋두리하듯 이야기한다. 그 고달팠던 시간을 사물의 관점에서 이야기한다. 그중에는 쾌적한 환경에서 잘 관리된 오브제도 있지만, 쓰레기로 분류되어 하마터면 폐기처분될 위기에 처했던 오브제도 있다. 공연 중간 오브제들을 관리해준 이들의 인터뷰 영상이 등장하긴 하지만, 인간은 단역에 불과하다. <십년만 부탁합니다>의 주인공은 단연 오브제들이다.
그런데 배우가 없는 연극을 연극이라 부를 수 있을까? 앞머리에 던진 질문에 이제 대답을 해야 할 것 같다. 그 대답에 앞서 질문을 먼저 하나 던진다. 미국의 작곡가 존 케이지의 <4분33초>는 음악인가?
<4분33초>는 존 케이지가 1952년 작곡한 피아노곡으로, 피아노가 아닌 다른 어떤 악기로 연주해도 무방하다. 실제로 존 케이지는 악보에 누구나 연주할 수 있다는 주석을 붙여놓았다. 어떤 악기에 의해서나 연주가 가능한 건, 이 악보에 아무것도 표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작품을 처음 연주한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튜더는 연주 내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가 한 일이라곤 악장이 끝날 때마다 피아노 뚜껑을 여닫는 일이었다. 제목은 연주 시간을 의미하는데, 존 케이지는 연주 시간은 연주자에 의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고 했다. 이 작품에서 존 케이지가 의도했던 건, 침묵도 혹은 소음도 음악이 될 수 있음을 들려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도발은 음악보다 미술에서 먼저 시도되었다. 미국의 화가 로버트 라우션버그는 존 케이지보다 한 해 앞서 1951년 순백의 작품 <백색 회화>를 발표했다. <4분33초>는 바로 이 <백색 회화>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된 곡이다. 어찌 보면 캔버스를 그대로 전시장에 옮겨다 놓은 듯 <백색 회화>에는 단 하나의 붓 터치도 발견할 수 없다. 선도 색도 없다. 작가가 이렇게 불성실해도, 무책임해도 될까 싶을 정도다. 그럼에도 <백색 회화>는 기존 화단의 전통과 회화를 둘러싼 고정관념에 대한 반발로 해석된다. 프랑스 극작가 야스미나 레자의 대표작 <아트>에 등장하는 작품이 아마도 이 작품이었을 것이다.
연극 <십년만 부탁합니다>는 <4분33초>나 <백색 회화>만큼 도발적인 작품은 아니다. <4분33초>는 음표를 없애며, <백색 회화>는 색을 없애며 장르의 전통을 전면적으로 부정했지만, 연극 <십년만 부탁합니다>는 연극 장르에 대한 전면적 도전은 아니다. 그럼에도 규범을 깨려는 시도는 발견할 수 있다. <4분33초>가 음악이라면, <백색 회화>가 미술이라면, <십년만 부탁합니다>도 연극일 것이다.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