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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11.16 18:34 수정 : 2017.11.16 19:40

박보나
미술가

중국의 소설가 김용의 <사조영웅전>(1957)에는 매력 넘치는 많은 무림의 영웅들이 등장한다. 천하제일의 다섯 고수를 일컫는 오절부터, 전진파 도사들과 강남칠괴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마음을 홀리지 않는 인물이 없다. 그중에 내가 가장 애정하는 캐릭터는 오절 중신통 왕중양의 사제 주백통이다. 주백통은 무공비법이 적힌 구음진경 때문에, 오절 사독 황약사와 다툼을 벌여 도화도에 15년간 갇히게 되는 인물이다. 15년간 혼자 무공을 연마한 주백통은 오절의 수준과 비슷한 경지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주백통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그의 뛰어난 무술 실력이 아니라, 천생 놀기 좋아하는 그의 성격이다.

바스 얀 아더르, <낙하 2>, 퍼포먼스, 암스테르담, 1970

재미와 놀이를 가장 중요히 여기는 주백통은 결정적인 순간에 상대를 골려주기 위해 거짓말을 하거나, 사라짐으로써 소설의 갈등적 전개를 돕는다. 동시에, 적절할 때 나타나 거짓말을 실토하거나, 심각한 순간에 웃음을 유발함으로써 이야기의 긴장을 완화시키는 감초 역할도 한다. 다른 영웅들과 달리, 주백통은 최고 고수 자리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파벌의 승계나, 바꿀 수 없는 규칙 같은 것은 주백통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를 움직이는 유일한 힘은 재미를 좇는 자신의 자유의지이다.

바스 얀 아더르(Bas Jan Ader)는 1970년대 미국에서 활동했던 네덜란드 출신의 미술 작가이다. 지붕 위에서 떨어지고, 나무 위에서도 떨어지며, 길에서도 쓰러지고, 자전거를 타다가 운하에도 빠지는 ― 떨어지고, 넘어지는 퍼포먼스 작업으로 유명하다. 33살의 나이에, 작은 돛단배로 혼자 북대서양을 건너는 퍼포먼스, <기적을 찾아서>(1975)를 하던 도중에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항해를 시작한 지 90여일 만에 빈 돛단배만 발견되었고, 아더르의 생사 흔적은 지금까지도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의 실종과 함께, 그의 작업은 사라짐과 죽음, 슬픔과 좌절의 맥락에서 주로 읽힌다. 그러나 나는 아더르의 작업을 주백통의 놀이와 자유의지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싶다.

애써 올라가지 않고, 애써 떨어지거나 넘어지는 것은 작가의 의지와 태도를 반영한다. 반짝거리고 아름답게 마무리된 물질적인 작품을 만드는 대신, 추락의 찰나를 기록하는 비물질적인 퍼포먼스를 한다는 것은, 미술 시장의 자본주의적 논리에 쉽게 편승하지 않겠다는 작가의 선택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위를 향하지 않고 아래를 향하는 낙하 행위는 기존 시스템 안으로 성공적으로 올라가기 위한 경쟁과 노력을 거부하겠다는 작가의 의지를 암시한다. <사조영웅전>의 주백통이 무림의 제일 고수로 인정받기 위해 싸우거나, 강호의 질서를 강화시키는 데 전혀 흥미를 갖지 않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아더르의 기존 제도에 대한 거부와 도전은 실종으로 완성된다. 아더르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힌 나이로 언급되는 33살에 기적을 찾기 위해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너무 작은 배, 33살, 기적을 찾겠다는 제목, 행방을 알 수 없는 작가의 실종은 수수께끼처럼 남아서, 작업의 결말을 유희적으로 열어 놓는다. 이 모든 것이 작가가 기획한 프로젝트의 일부일 수도 있으며, 결국 작가는 미술 제도를 빠져나가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의 여지를 남긴다.

이야기에 숨구멍을 열어 주는 주백통의 놀이 의지나, 미술 시스템 밖으로 계속 튕겨져 나가려는 바스 얀 아더르의 낙하 및 실종 의지는 견고한 제도의 권위와 질서를 슬쩍 흔들어 놓는다. 순응적으로 안주하거나, 의심 없이 위로 올라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미끄러지고 도망치는 이들의 자유의지는, 멈추어 있고 고여 있는 모든 시스템을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할 수 있는 운동성을 만들어 낸다. 자유롭고, 해방적인 주백통의 캐릭터와 바스 얀 아더르의 작업은 그래서 중요하고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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