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12.28 18:16
수정 : 2017.12.28 19:13
박보나
미술가
심장 떨리는 공포영화, <미저리>, <캐리>, <샤이닝>의 원작자인 스티븐 킹은 공포 스릴러 소설의 대가이다. 킹은 <죽음의 무도>에서 공포를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잘린 목이 계단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볼 때 느끼는 ‘역겨움’(The Gross-out), 공룡 크기의 거미들이나 죽은 사람이 주변을 돌아다닐 때 느끼는 ‘무서움’(The Horror),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보니 물건들이 모두 비슷한 물건으로 바뀌어 있음을 보았을 때 느끼게 되는 ‘두려움’(The Terror)이 그 분류 유형이다. 나는 이 중에서 ‘두려움’에 대한 정의에 상당한 흥미를 느끼는데, 익숙한 것이 조금 바뀌었을 때 만들어내는 감각의 환기와 그 충격이 발생시킬 수 있는 질문과 변화의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읽기 때문이다. 미술 작가들도 익숙한 것을 약간 다르게 보여줌으로써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흥미로운 작업을 만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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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만 온다크, <좋은 때, 좋은 기분>, 퍼포먼스, 런던 프리즈 아트페어,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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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미술가 가브리엘 오로스코는 1993년 미국 뉴욕에서 연 첫 개인전에서 <홈 런>(Home Run)을 발표한다. <홈 런>은 전시장 창문 너머로 보이는 건너편 아파트 창가에 오렌지를 설치한 작업이다. 관객은 전시장을 채우고 있는 미술작품을 볼 수 없다. 대신, 창문 너머로 보일 듯 말 듯, 원래 그런 듯 아닌 듯, 창가마다 무심하게 놓인 작은 오렌지를 우연히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관객이 오렌지를 하나 발견하는 순간, 다른 모든 집의 창가에도 똑같이 오렌지가 놓여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불가해하고 부자연스러운 상황이 주는 감각적인 혼란과 충격은, 그것이 작가가 연출한 작업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서 의미있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미술작품은 크고 예쁘게 잘 만들어져야 하며, 잘 보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미술은 일상적 순간과 어떻게 다른가? 미술작품은 미술관 안에 안전하게 설치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작가는 오렌지를 올려놓는 미세한 제스처로, 이 모든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며, 전통적인 미술작업의 문법을 흔들어 놓는다.
슬로바키아 작가 로만 온다크의 2003년 작업 <좋은 때, 좋은 기분>도 일상적 상황을 살짝 뒤튼 퍼포먼스 작업이다. 온다크는 퍼포머들을 고용하여 런던 프리즈 아트페어의 브이아이피(VIP)실 앞에 줄 세워 놓는다. 줄 서는 문화가 익숙한 런던에서 이 퍼포먼스는 런던의 매일의 풍경과 다를 바 없다. 관객들은 줄어들지 않는 줄과 바뀌지 않는 사람들에게 불편함과 혼란을 느끼다가, 어느 순간, 이 모든 것이 미술작업이라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다. 그리고 이 퍼포먼스의 상황이, 아무리 줄을 서 있어도 브이아이피실에는 들어가지 못하는 자신들의 현실과 똑같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된다. 온다크는 일상적인 상황을 미술 안으로 슬며시 가져와서, 관객에게 미술 구조 안에서의 계급과 자본 관계를 똑똑하게 보여준다.
오로스코와 온다크의 작업은 익숙한 일상을 미술작업과 겹쳐 놓음으로써 혼란스럽고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항상 그 자리에 있던 것이 조금 바뀌었을 뿐인데, 관객들은 낯설고 껄끄럽다고 느낀다. 이 불안한 감정은 스티븐 킹이 말한 ‘두려움’과 비슷한 결을 갖는데, 중요한 자각의 순간을 동반한다. 무엇이 바뀌었는지, 왜 불편한지 질문함으로써 새로운 관점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새롭게 바라본 세상은 더 이상 이전의 것과 같을 수 없다. 그리고 달라진 세계에서 비로소 다른 질서에 대한 고민을 시작할 수 있다.
변화는 어색함과 ‘두려움’과 함께 시작되지만, 결국 다른 관점으로 새로운 질서를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한겨레>가 새롭게 구성할 세계를 기대하면서, 그동안 미흡한 글들을 쓸 수 있게 도와주시고, 읽어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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