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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박사과정 저는 북에서 왔습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다른 세상 앞에 멍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4 후퇴 때 한국에 와서 정착하신 분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분은 나를 책방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나는 책을 사 주려는가 보다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명작들이라고 하면서 영화 디브이디(DVD)를 사 주셨습니다. 저에게 한국 사회를 빨리 이해하는 데 영화나 음악만큼 좋은 것은 없다고 하시면서. 이걸 짬짬이 보다 보면 들려오는 노랫말, 광고나 잡지 등에서 나오는 말들에 익숙해지고 그만큼 사회 적응이 빨라진다고요. 그때 사주신 영화가 아직도 제 책상 서랍에 고이 모셔져 있었습니다. <로빈훗>, <에덴의 동쪽>, <나이아가라>, <자이언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지상에서 영원으로>, <무기여 잘 있거라>, <삼손과 데릴라>, <카사블랑카>, <웨이크 아일랜드>, <노인과 바다> 등이었습니다. 일부는 신기해서, 일부는 몰입해서, 일부는 보라고 하니까 억지로 보았습니다. 그 뒤로 적응기를 거치면서 지상파 방송을 통해 많은 영화를 보았습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어쩌다 <교육방송>(EBS), <한국방송>(KBS)을 통해 처음 봤던 그 영화들이 다시 방영되면 나도 모르게 빙그레 웃습니다. 그때 보라고 하니까 보았던, 적응해야 해서 억지로 봐야 했던 기억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는, 지금 보니 처음 내가 접한 영화들은 매우 옛날 영화였습니다. 사실 그분의 연세는 70대이십니다. 어쩌면 그 자신이 젊은 시절 즐겨 보았던 영화들을 우선 추천해 주신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다 보니 정작 또래가 공유하는 음악이나 영화에 대해서는 너무 몰랐습니다. 하긴 누군가 옆에서 이야기해준 적도 없었습니다. 열심히 일에, 공부에 매진하다 보니 한가하게 영화나 음악을 보고 듣고 이야기 나눌 여유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어느덧 시간이 많이 흘러 여유가 생기니 점차 주변에 관심을 갖게 되고, 같은 또래와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이었습니다. 어느 날 친구와 집으로 가는 길에 분리수거장에 버려져 있는 음반 시디(CD)를 발견했습니다. 워낙 많은 양이 버려져 있어서 친구와 저는 자연스럽게 다가갔습니다. 내 눈에는 뭐 그냥 옛날 음반 같았습니다. 그런데 함께 본 친구의 반응은 너무 달랐습니다. 그는 거듭 ‘이 음반을 왜 버렸지?’라며 놀라워했습니다. 버려져 있는 시디를 골라내면서 좋아하는 모습에 저는 어리둥절했습니다. 그때 골라낸 시디가 ‘녹색지대’, ‘김건모’, ‘80년대 빌보드 차트’ 등입니다. 그는 그 시대 이 음악들이 가진 의미에 대해 신나게 설명했고, 현재의 상황에 즐거워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친구가 골라준 음악을 듣고 있습니다. 일부는 귀에 익고, 일부는 처음 들어보는 음악입니다. 아직도 한국 사회는 저에게 알아가고 배워야 할 것이 많음을 알려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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