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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5.09 17:56 수정 : 2018.05.09 19:56

진나리
대학원 박사과정

저는 북에서 왔습니다. 다행히 잘 적응해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쑥불쑥 내가 잘 적응하고 있는지 의심이 듭니다. 바로 몇 년 전에 한국에 오신 아버지 때문입니다.

사실 아버지는 나를 비롯하여 내가 보아왔던 다른 탈북민보다 더 빠르게 한국 사회에 적응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큰 걱정 없이 서로 왕래하며 잘 지냈습니다. 그런데 가끔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이십니다. 아버지의 행동은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고, 또 걱정이 많아지게 합니다. 아버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 중 하나가 바로 불쑥불쑥 집에 찾아오는 일입니다.

여느 어르신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는 잠이 없으십니다. 북에서 같이 살 때도 아버지는 잠이 없으셔서 혼자 방문을 닫고 밤새도록 신문이나 책을 보시곤 하셨습니다. 그때는 별생각 없이 그냥 그런가 했습니다. 한국에 온 후로도 아버지는 새벽 4시쯤이면 잠에서 깨서 활동하십니다. 북에서 살 때와 달라진 점은 궁금하거나 하실 말씀이 있으면 새벽이건 한밤중이건 아무 때나 전화로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혼자 사는 딸이 밥이라도 잘해 먹는지 알고 싶어 새벽같이 음식을 만들어 오십니다. 새벽 6시에 불쑥 찾아오셔서 음식이 짜지는 않은지, 양은 충분한지, 그리고 무엇보다 맛있게 먹는지 살펴보십니다. 흐뭇해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싫은 티를 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혼자이기에 딱히 문제가 될 건 없었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나니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신혼이기도 하고 이젠 둘이 사는데, 아버지는 혼자 살 때보다 더 자주 뭔가를 챙겨 들고 아무런 연락도 없이 이른 아침에 집에 찾아오십니다. 이제 결혼했으니 이러면 정말 안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지난 주말에도 사위와 나누어 마실 보드카를 챙겨 오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연락 없이 불쑥 찾아오시면 정말 불편하다고 말씀드렸더니 오히려 사위와 술 한잔 마시러 오는 것도 허락을 받아야 하냐고 화를 내십니다.

아버지는 한국 생활 4년 차가 되어감에도 여전히 북한에서 살던 그때처럼 행동하십니다. 아직도 전화를 사용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고 미리 연락하는 것보다 몸이 먼저 움직입니다. 자식 집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부모가 간다는 사실만으로 별 문제의식이 없습니다. 챙겨주시는 것에 한없이 감사하다가도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나 싶어 세게 말을 하면 섭섭하다 하십니다.

과거에 저는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바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땐 정말 정신적으로도 몸도 아주 힘들었습니다. 그 순간이 지나가니 이제는 한국에 오신 아버지에 적응해야 합니다. 어쩌면 과거를 함께 공유했고 현재를 같이 살아가는 지금 저는 아버지로 인해 몸보다도 마음이 바쁩니다. 그리고 말 한마디에도 신경이 쓰입니다. 가장 많이 하는 말, “그러면 안 돼요”라고 하는 게 참 어렵습니다. 부모 된 맘으로 챙겨주시는데, 자식 된 도리로 늘 안 된다는 말을 달고 살아야 하니 가끔은 한국에 사시는 아버지가 안쓰럽습니다. 어쩌면 지금이 서로 가장 적응이 안 되는 시기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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