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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6.06 17:23 수정 : 2018.06.06 19:18

진나리
대학원 박사과정

저는 북에서 왔습니다. 하루는 친구가 땅만 보고 걷는 저에게 땅에서 뭘 주워 본 적 있느냐고 물은 적 있습니다. 저는 ‘아니’라고 하며 ‘그런데 갑자기 왜?’ 하고 물었습니다. 친구는 ‘자꾸 땅만 봐서, 눈을 들어 앞을 보면서 걸으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무언가 변명을 하고 싶었지만, 왠지 모를 창피함도 느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언젠가부터 나는 그 친구와 걸을 때 나도 모르게 머리를 들고 앞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 뉴스에 북한의 젊은 대학생들의 패션이 소개되었는데,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굽 높은 신발이었습니다. 학생들이 저렇게 굽 높은 신발을 신어도 되느냐는 기사에 달린 댓글도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그러다 불쑥 북에 있을 때 나는 뭘 신고 다녔지 하면서 아주 잠깐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정작 북에 있을 때, 굽 높은 신발을 신을 수 없었습니다. 큰 키 때문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북의 여자 키 표준이 158㎝인 데 반하여 저는 무려 162㎝였습니다. 중·고등학교, 대학까지 제가 학교를 다닐 때는 저처럼 키가 큰 여학생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렇다 보니, 선물로 굽 높은 신발을 받아도 늘 굽이 낮은 신발만 신고 다녔습니다. 안 그래도 키가 크다는 이유로 꺽다리, 전봇대 등등의 놀림을 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북한에서는 눈에 띄지 않게 살아야 하는데 늘 키 때문에 눈에 띄게 되고, 줄만 서면 자라목이 되어 지명 대상이 되곤 했던 안 좋은 기억들만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굽 없는 신발을 신고 다녀도 울퉁불퉁한 도로 사정 탓에 길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제가 살던 곳은 도시였음에도 움푹 패고, 갈라지고, 포장이 되어 있어도 보수가 제때 안 된 길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평양에 갔는데 그곳의 여학생, 여대생들은 모두 굽 높은 신발을 신고 있었습니다. 물론 한국에서 쉽게 눈에 띄는 하이힐은 좀처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대부분 통굽이었습니다. 나중에 중국과 거래가 활발해지면서부터 정말 굽 높은 신발들이 많이 들어왔는데, 워낙 도로 사정이 안 좋으니 새 신발이라 하여도 얼마 못 가 해지고, 구두 수리를 맡겨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랬던 기억이 있어 한국에 와서도 한동안은 굽이 낮은 신발을 신고 다녔습니다. 좀 적응이 되면서부터는 키가 크다고 힐을 못 신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는 점차 굽 높은 신발에 매력을 느끼고 즐겨 신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전히 땅만 보고 다닌다는 것입니다. 워낙 어릴 때부터 북한에서 버릇처럼 땅만 보고 다녔던 터라 쉽게 고쳐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길 가다 뒷굽이 보도블록이나 배수구 구멍에 끼이는 상황이 발생하곤 합니다. 아니면, 보도블록에 굽이 긁혀 새 신발에 흠이 나는 상황도 여러번 겪었습니다. 이렇게 되다 보니 이제는 큰 키 때문이 아니라 새로 산 구두를 예쁘게 오래 신으려고 땅을 보며 걷게 되었습니다. 어제도 그리고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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