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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9.26 18:12 수정 : 2018.09.26 19:20

진나리
대학원 박사과정

저는 북에서 왔습니다. 남북한의 추석을 마주하는 모습은 조금씩 다릅니다. 추석이라고 해도 북한에서는 여러 도에 흩어 지내던 친척들이 다 모일 수 없습니다. 다른 지역에 사는 친척이 추석에 같이 산소를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한국처럼 서울에서 광주, 부산에 이르기까지 기차로, 자동차로 고향을 방문할 만큼 북한의 교통 사정이 녹록지 않고 쉬는 날도 짧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친척 중 산소 근처에 집이 있는 형제가 도맡아 상을 차렸습니다. 하지만 맑고 푸른 가을 하늘 아래 조상을 생각하고, 형제간 친목을 도모하면서 음식을 나누어 먹는 방식은 다를 바 없습니다.

남한에서 추석을 보내는 지금, 북한에서의 추석을 회고하면 즐겁기만 했던 기억뿐입니다. 저에게 추석은 아침부터 들뜬 마음에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언제쯤 시골로 가는지 궁금했고, 부모님과 차량 적재함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가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시골에는 일년에 단 한번이지만 반갑게 반겨주는 친척들이 있었습니다. 인사를 나누고 아버지는 항상 그랬듯 낫을 빌려 곧바로 할아버지 산소가 있는 곳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산소로 가는 길에 보이는 논밭 풍경은 일년이 흘렀어도 그대로였습니다. 부모님은 가는 길에 낯익은 얼굴들을 보면 반갑게 인사하고 안부를 물어보곤 했습니다. 그렇게 산소에 도착해 어른들이 주변의 풀을 정리하고 상을 차리는 동안 저는 산소 주변 언덕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꽈리를 땄습니다. 추석이 지나 학교에 가면 누구 꽈리가 더 큰지, 누가 꽈리를 잘 부는지 경쟁하기 때문입니다.

상이 차려지고 무릎을 꿇고 인사를 드리는 모습은 한국과 다르지 않습니다. 인사가 끝나면 항상 아버지는 봉분의 아래쪽, 상 옆 모퉁이의 흙을 파서 술을 살짝 붓고, 음식을 조금씩 떼서 묻었습니다. 저는 해마다 보았지만 매번 신기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묻은 건 그대로 있는지 늘 궁금했습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께 일년 양식이라면서 많이 드시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렇게 인사가 끝나면 모여 앉아 준비해 온 음식을 먹곤 했는데, 나의 온 신경은 사과와 배에 가 있었습니다. 자주 먹을 수 없기도 했지만, 추석 때 산소에 준비해 가는 사과, 배는 정말 크고 맛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산소에서 시간을 보낸 후 친척이 챙겨주는 배추며 무, 호박 등을 한 짐 지고 우리 식구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부터 김장 때까지 우리는 챙겨 온 배추와 무로 담근 김치를 먹으며 추석을 회고하고 친척들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국에 온 후 도로를 가득 메운 차량, 일찌감치 매진된 케이티엑스(KTX), 인천공항을 가득 메운 인파를 보면 저는 많은 생각이 듭니다. 몇 시간이 걸려도 추석날 고향에 다녀올 수 있다는 것, 시간만 허락하면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새삼 이동의 자유에 감사함을 느끼는 추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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