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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박사과정 저는 북에서 왔습니다. 저는 한국으로 오기 위해 중국에 잠시 머물렀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선양에서 처음 한국식 찜질방에 가게 되었습니다. 물론 북한에도 비슷한 곳이 있습니다. 이름은 ‘한증탕’입니다. 그런데 ‘한증탕’은 한국식 찜질방처럼 크지도 않았고 탕의 물은 그렇게 뜨겁지도 않았습니다. 또 탕은 작은데 사람은 많아 불편하기도 했습니다. 제가 북에 있을 때, 2000년대 초중반 무렵의 일입니다. 북한은 기관마다 ‘한증탕’을 만들라고 했고 그 때문에 제가 다녔던 학교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탕을 덥히려면 개인이 나무를 가져와 불을 때야 했습니다. 수돗물이 안 나오면 그마저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 있는 한국식 찜질방은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되었습니다. 찜질방은 단순히 목욕하기 위해 오는 곳이 아니라 온 가족이 주말이면 놀러 오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한국에 온 뒤로 저는 찜질방에 가끔 갑니다. 뜨끈뜨끈한 방에서 실컷 땀을 내고 씻어내는 즐거움이란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가끔은 일년에 한두번 세신사에게 몸을 맡깁니다. 얼마 전에는 찜질방에서 티브이 광고에 자주 등장하는 안마의자에도 앉아 보았습니다. 안마의자에 앉아 이 생각 저 생각 하다 저는 불쑥 아버지가 처음 중국에 왔을 때 찜질방 체험을 시켰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아버지가 중국에 왔을 때 저는 제일 먼저 찜질방에 모셔갔습니다. 북한에 그 추운 곳에서 살다 오셨는데 뜨끈뜨끈 찜질방만큼 좋은 곳이 어디 있겠습니까? 중국말을 못하는 아버지가 염려되어 저는 조선족 운전기사 아저씨와 친척 아저씨에게 부탁을 드렸습니다. 조선족 두 아저씨도 이렇게 큰 곳은 처음 와 본다, 아버지 걱정 말라고 하면서 즐거운 기분으로 들어가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자리를 뜨지 못하고 탕 앞에서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들어가신 지 10분 정도 되었나? 갑자기 운전기사 아저씨가 나오시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왜 나오시냐 했더니 자신은 안 한다고, 아버지는 잘 들어가셨으니 걱정 말라고 하면서 어디론가 가셨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한시간쯤 되었나 아버지랑 친척 아저씨가 함께 나오셨습니다. 저는 너무 궁금하여 어땠는지 물어보았고, 아버지는 “얘야, 몇년 묵은 때 다 벗겼다. 근데 그 사람 힘들었을 거다. 나 만나서 고생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친척 아저씨의 말로는 세신사 아저씨가 땀을 엄청 흘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운전기사 아저씨는 그렇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옷 벗어야 한다는 사실에 놀라서 그냥 나왔다고 합니다. 그 아저씨도 우리 아버지도 대중목욕탕엔 처음이었던 것입니다. 저의 아버지도 싫다, 안 하겠다 하는 걸 친척 아저씨가 겨우 설득해서 가능했다고 합니다. 지금도 아버지는 그때 일을 떠올리면 웃기만 합니다. 안마를 마친 뒤 저는 식혜와 맥반석 달걀을 주문했습니다. 처음에는 땀 흘린 뒤에 마시는 식혜와 맥반석 달걀의 맛을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맛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습니다. 휴식이 가져다주는 삶의 여유를 즐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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