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2.13 18:34
수정 : 2019.02.13 19:20
진나리
대학원 박사과정
저는 북에서 왔습니다. 이제는 남한에 온 지도 꽤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여전히 일년에 한번은 북한에서와 같은 방식으로 지냅니다. 바로 설 때입니다. 북한에 살 때 저는 없는 살림에도 새해를 맞이하면서 구석구석 집 안을 청소하고 빨래하고 정리를 했습니다. 그러고는 가장 좋은 옷을 골라 입고 새해 아침을 맞이하곤 했습니다. 옷이라고 해봐야 몇벌 안 되니 제 것은 농 하나면 되었습니다.
한국에 온 뒤로도 이 방식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새해를 맞이할 때는 뭔가 남달라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늘 하는 청소지만 설 전날 하는 청소는 의미가 달랐습니다. 늘 입는 옷이지만 굳이 새해 아침에 입는 옷은 예쁜 옷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한해 두해 흘러가면서 제게도 옷이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에서는 자그마한 농 하나가 내 옷의 전부였는데, 지금은 작은방에 옷이 가득합니다. 예쁜 옷도 워낙 많아 뭘 입을지 고민을 해야 합니다. 언제부터 이렇게 옷이 쌓이기 시작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북에서 살 때는 일년 열두달 외출복이라고 해봐야 달랑 몇벌이었는데, 여기는 한 계절 외출복만 해도 몇벌 됩니다. 해 지나면 달라지는 유행에 입고 안 입고를 반복하다가 사들인 새 옷도 여러벌 됩니다. 그렇다고 막 버리기도 아깝습니다. 몇번을 돌아보고, 생각하고 만져보고 산 옷들인지라 버리면 꼭 돈을 버리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잘 입게도 안 됩니다. 그렇게 유행에 민감하고 스타일에 유별난 것도 아닌데, 해가 지날수록 몸매가 달라지나 눈높이가 달라지나 하여튼 잘 안 입게 됩니다.
물론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닙니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주변 지인들이 제 스타일을 바꿔준다고 좋은 매장, 좋은 옷을 골라준 적이 여러번 됩니다. 다들 키도 크고 몸매도 좋은데 왜 이런 옷만 입느냐고 하면서요. 그런데 그때마다 그 옷들이 제게는 맞지 않았습니다. 다들 멋있다고 하는데, 나만 남의 옷 빌려 입은 듯 불편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문화 차이였던 것 같습니다. 문화적으로 익숙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옷도 제겐 소용없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초기 몇년 동안은 북한에서처럼 한두벌 갖고 돌려 입었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쌓여 있는 옷을 보면서 고민하는 사람들이 참으로 한심했습니다. 이런 게 자본주의인가 비웃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제가 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멋있는 옷이 너무 많아 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한벌 두벌 샀더니 이제는 그 옷들이 짐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옷만 짐이 되는 게 아닙니다. 주방 그릇이며 각종 생활용품, 신발들, 넘쳐나는 물건들의 홍수 속에서 저는 살고 있습니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는 속담처럼 늘 부족하기만 했던 북한에서의 삶을 잊고 사는 건 아닌지 가끔 속으로 뜨끔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오늘날 남한 사회에서 북한에서처럼 살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문화적 차이가 줄어드니 제게는 넘쳐나는 물건들 정리가 고민으로 다가옵니다. 과유불급이 머릿속에 맴도는 하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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