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6.11.23 19:38 수정 : 2016.11.23 19:50

[ESC] 강제윤의 섬에서 맛난 밥상
전남 여수 손죽도

전남 여수 손죽도 한 민박집의 밥상. 강제윤 제공
“제주년 배 떨어진디”, “독 보듬고 돈디”, “손잡고 돈디”, “처녀 베 짠디”, “지지미”, “날나리”. 영화 <늑대와 함께 춤을>이 생각나게 하는 지명들이다. 한자 지명투성이인 나라에 이토록 쉬운 우리 말 지명들이 온전히 남아 있는 곳은 전라남도의 ‘가고 싶은 섬’, 여수 손죽도다. 독 보듬고 돈디는 암벽 해안에서 돌을 보듬고 돌아야만 지날 수 있는 험한 곳의 지명이고 손잡고 돈디는 비탈진 암벽에서 누군가 손을 잡아주어야만 건널 수 있는 곳이다. 처녀 베 짠디는 처녀들이 모여서 베를 짜던 곳이고, 지지미는 섬사람들이 봄이면 몇날 며칠씩 진달래 화전도 지져 먹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며 놀던 곳이다. 날나리는 험한 길이 계속되다 걷기 평지가 나타나자 날아갈 듯 좋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제주년 배 떨어진디는 제주 해녀들이 물질하러 배에서 뛰어내리던 곳이다.

섬에는 화전놀이 때 불렀던 노래도 구전되는데 섬사람들의 생활사가 그대로 기록되어 있어 흥미롭다. 시답지 않은 시들보다 백배 낫다. 풍부한 은유와 시적 상징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말 못하는 술 담배는 내 속을 아는데 말 잘하는 당신은 내 속을 모르네/ 이 아래 갱번(바닷가)에 굴 까는 처녀야, 언제나 다 깨고 내 사람이 될래/ 남남이 만나서 부부라 치고, 수십년 뱃삯 없이 내 배를 탔네/ 신작로 복판에 솥 때운 사람아 정떨어진 것은 때울 수가 없나/ 삼각산 몰랑(산봉우리)에 비 오나 마나, 어린 낭군 품안에 잠자나 마나”

손죽도에는 청년 장수 이대원(1566~1587) 장군의 사당이 있다. 임진왜란 3년 전 손죽도에서 왜구와 전투 중에 전사한 이대원 장군은 18살에 무과에 급제했고, 21살에 흥양(고흥)의 녹도만호(종4품)가 됐다. 녹도는 지금의 녹동이다. 1587년 2월초 녹도 앞바다에 출몰한 왜구들을 섬멸했다. 장군은 이 전투에서 적장을 생포해 전라좌수사 심암에게 넘겼다. 수사는 공을 자기 것으로 하자 했으나 장군은 이를 거절했다. 수사는 깊은 원한을 품었다. 2월17일, 대규모 왜구들이 다시 손죽도를 침략했다. 수사는 수적 열세를 알고도 단지 100여명의 병사만을 내주며 장군의 출병을 재촉했다. 장군은 무모한 출정을 반대하고 날이 밝으면 군사를 더 모아 출정하기를 간언했다. 수사는 강제 출병을 명했다.

장군은 수사에게 지원병을 청하고 출전했으나 수사는 끝내 출병하지 않았다. 장군은 3일 밤낮을 격렬히 싸우다 패했다. 장군은 혈서로 쓴 절명시를 남기고 왜구에게 사로잡혔다. 왜구는 장군의 항복을 받아내려다 거절당하자 돛대에 매달아 죽였다. 장군의 억울한 죽음은 덮어질 뻔했으나 전투를 함께했던 부하 손대남이 살아 돌아가 진상이 밝혀졌다. 1587년 3월 선조의 어명에 따라 한양으로 압송된 심암은 당고개에서 참수됐다. 사건의 전말은 송강 정철의 아들 정기명이 지은 ‘녹도가’에 전해진다. 손죽도 사람들은 오랜 세월 이대원 장군을 수호신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왔다.

낙도지만 그만의 문화와 역사를 만들고 살아온 손죽도답게 민박집에서 내놓은 음식은 토속적이고 순정하다. 손죽도 앞바다에서 해녀가 잡은 전복·소라회와 문어숙회는 찰지고, 맑은 물에만 산다는 쏨뱅이회무침은 담백하다. 먼바다 섬이라 외부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 거북손이나 따개비류도 지천인 만큼 밥상은 더욱 풍성하다. 손바닥만한 조선홍합도 더없이 쫄깃하다. 국은 삼치 미역국. 삼치로 미역국을 끓인다는 것을 도시 사람들은 믿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혀 비린 맛이 없고 시원하다. 진귀한 해산물의 향연. 이 모두 거문도 인근에 위치한 손죽도 청정 바다에서 바로 건져 올린 싱싱함 때문에 가능한 밥상이다. 내륙의 도시에서는 돈이 있어도 불가능한 밥상. 산 넘고 물 건너 머나먼 낙도까지 오는 수고를 감내해야만 받을 수 있는 황홀한 밥상. 한 끼 밥상을 위해 천리 길도 멀지 않다고 느껴질 만한 성찬. 섬 여행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강제윤 시인·섬연구소장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ESC : 강제윤의 섬에서 맛난 밥상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