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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10.13 19:11 수정 : 2006.10.13 19:23

박노해 시인의 레바논 보고 -마르와 힌

“샤이르 박, 빨리 타요! 빨리 타.”

남부 국경 지대 마르와 힌을 찾아갔다. 가서 보니 바로 100미터 앞이 이스라엘 국경일 줄이야! 나는 차를 세우고 내려서서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맞은 편 숲에서 이스라엘군의 총구와 포신이 햇빛에 번득이고 있었다. “샤이르 박, 빨리 타요! 빨리 타.” 하면서 운전기사는 공포에 질려 슬슬 차를 앞으로 빼더니 달려가기 시작했다. 비로소 공포가 실감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바로 코앞 철조망 너머의 이스라엘군의 총구를 등 뒤로 의식하며 떨리는 발걸음으로 언덕 너머에서 소리치고 있는 차를 향해 걸어갔다. 마르와 힌에 도착하자 주민들은 다들 벌떡 일어나 아무 말도 없이 우리를 도깨비 보듯이 바라보았다. 알고 보니 점령지였던 마르와 힌은 어제서야 이스라엘군이 국경 너머로 철수했다는 것이다. 마르와 힌도 수십 채가 폭격 되었고 주민 23명이 죽어갔다. 15명이 아이들이었다. 마을 주민들은 점령의 공포와 불안으로 납덩이를 매단 듯 말소리조차 짓눌려있었다. 파괴된 집을 재건하던 한 주민이 말 없는 손짓으로 나를 부르더니 뜨거운 샤이를 내놓았다. 그는 종이를 꺼내 뭔가를 쓰기 시작하더니 슬며시 손에 쥐어주었다. 남아있는 이스라엘 첩자와 도청의 불안 때문이었다. 그 쪽지에는 ‘오늘 오후 2시에 주민 네 명이 납치되었고,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소년 한 명을 또 납치해갔습니다. 점령지에서 철수한 데 대한 보복과 포로교환용으로 생각됩니다. 어둡기 전에 이 마을을 빠져나가셔야 합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이는 그의 얼굴에는 점령지의 고립과 무기력과 공포가 드리워져 있었다.

위대한 평화의 수호자들

박노해 시인의 레바논 보고 -마르와 힌 점령지의 아이들

바로 코앞에 번쩍이는 이스라엘 국경의 총구 앞에서 일거수일투족이 드러나는 벌거벗은 생활 속에서 말도 웃음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고 헤즈볼라 사진 한 장 붙이지 못하는 주민들. 주민들은 사진을 찍고 있는 나에게 다가와 어느 외신도 우리 마을 한 번 찍어간 적 없는데, 이제 우리 마을이 외부에 알려질 수 있게 되었다고 낮은 목소리로 고마워하는 것이었다. 왜 이 마을을 안 떠나고 계십니까? 라고 물으니 “우리의 땅은 값집니다. 주민이 없는 점령지는 이스라엘의 정착촌이 되고 맙니다. 어떻게든 살아 버티는 게 내 나라 내 땅을 지키는 소리없는 저항입니다.” “이번 전쟁에서 우리 마르와 힌 주민들은 유엔 캠프 안으로 피난을 들어가려고 찾아갔지요. 유엔군이 거부해서 피난을 떠나다 길 위에서 죽음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유엔에게 버림받고, 세계에서 고립된 채 이 작은 마을에서 23명이나 되는 주민들이 죽었고, 그중에 15명의 어린아이들이 학살당했습니다.”

마르와 힌 아이들은 처음으로 찾아온 외국인 곁을 빙빙 돌며 미소를 짓고 말을 걸고 손을 잡고 마을 이곳저곳 파괴된 곳을 보여주더니 죽은 친구들 사진을 붙인 자동차 옆에 서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한다. 생글거리던 아이들 표정이 금세 슬픔으로 돌아선다. 마을 사람들은 아이들이 저렇게 활짝 웃는 모습은 처음 본다며 차츰 모여들기 시작했다. 대부분 노인들이었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하룻밤이라도 지내고 싶었으나 마을사람들은 “곧 해가 떨어진다. 어서 떠나라. 무사히 빠져나가기를 기도하겠다.”며 등을 떠미는 것이었다.

점령지의 공포와 무기력감에 시들어가는 아이들을 남겨두고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어둡기 전에 서둘러 국경선을 빠져나가야만 했다. 위대한 저항은 총을 든 용기있는 사람들만의 몫이 아니다. 자기의 땅에서 꼼짝없는 고립과 공포를 견디며 살아내는 사람들, 자신의 자리를 굳게 지키는 마르와 힌 주민들과 아이들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위대한 평화의 수호자였다.

하산 나스랄라 ‘영혼의 남자’로 최고의 섹시가이로

박노해 시인의 레바논 보고 -하산 나스랄라

정부도 아닌 일개 ‘테러단체’로 불리던 헤즈볼라는 세계 최강의 미국과 중동 최강의 이스라엘에 맞서 그들을 처음으로 인류 앞에 무릎 꿇렸다.

최고 지도자인 하산 나스랄라는 이제 레바논을 넘어 중동 이슬람 13억 인구의 영웅으로 부상하였고, 더 이상 한 나라의 지도자가 아닌 21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글로벌 리더의 하나로 부상하고 있었다. 하산 나스랄라의 장남은 17살의 나이로 전사했고 차남은 최전선에 전투병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하산 나스랄라는 이슬람 성직자이자 권위를 가진 엄격한 율법 학자로서 이스라엘 침공에 맞선 최전선에서 자기희생의 모범을 보인 리더라고 거의 모든 레바논 주민들은 전적인 신뢰를 보내고 있었다.

지금 레바논의 집과 거리와 차와 모든 가게에는 하산 나스랄라의 사진이 붙어있다. 거리나 식당 어디서나 울려 퍼지는 레바논 최고의 히트곡은 ‘사끄르 루부난’라는 하산 나스랄라와 헤즈볼라를 응원하는 노래였다. 지금까지 나는 여러 나라의 지도자와 게릴라 지도부를 만나 왔지만, 그는 강렬한 인상과 위엄있는 풍모로 나에게 다가왔다.

40대 젊음의 뜨거운 열정과 사심없는 진정성, 탁월한 글로벌 안목과 정치적 식견, 대중을 사로잡는 시적 감동의 언술과 논리적 사고능력, 레바논 정부에 장관과 의원을 파견한 정당의 대표성과 무장 저항단체의 대표성을 넘나드는 섬세한 조직적 리더십, 엄청난 규모의 수익을 창출하는 뛰어난 경영마인드를 지닌 CEO, 이슬람 성직자의 깊은 영성과 율법학자의 엄정함과 함께 뭇 여성들에게 ‘영혼의 남자’로 최고의 섹시가이로 떠오르는 활달한 남성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 하산 나스랄라의 풍모와 패션에서 오는 매력은 대단했다. 이슬람 시아 전통의 복장이 세련되고 기품있는 차별적 패션으로, 숭고함과 우아한 멋을 펄럭이고 있었다. 글/사진 박노해 시인

박노해 시인은?

박노해 시인
이스라엘의 침공을 받아 파괴된 레바논을 최근 박노해 시인이 다녀왔다. 박 시인이 현지에서 직접 찍은 사진과 글을 연재한다.

시인 박노해(48)씨는 1983년 동인집 <시와 경제>를 통해 등단했다. 1984년 시집 <노동의 새벽>으로 80년대 노동문학의 총아로 떠올랐다.

1991년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수감됐다가 1998년 석방됐다. 시집으로 <참된 시작>, 산문집 <사람만이 희망이다> <아체는 너무 오래 울고 있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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