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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10.20 20:11 수정 : 2016.10.21 08:39

서영인의 책탐책틈

식민지 시기의 문학을 원문으로 읽다 보면 여기저기서 ‘××’, ‘00’ 등으로 표기된, 원래의 글자가 지워진 흔적을 발견한다. 이른바 복자(伏字), 검열의 결과이다. 두 글자인 경우 ‘해방’이나 ‘혁명’, 혹은 ‘착취’ 같은 글자를, 네 글자인 경우 ‘사회주의’나 ‘계급투쟁’ 같은 글자를 채워 넣어 읽으면 대략 말이 되었다. 당대의 독자들도 그랬을 것이다. 필자들이 검열을 미리 피하면서 자신의 의사를 전달한 경우도 있었다. ‘마르크스’를 ‘자본론의 저자’로, ‘레닌’을 ‘블라디미르’로 표기한 것이 대표적 예이다. 매뉴얼밖에 모르는 검열관들을 조롱하는 부수적 효과도 있다. 당대의 독자들도 이심전심으로 필자의 의도를 알아채며 의외의 소통감을 느꼈을 것이다. 표현의 자유는 문학예술의 생명이며, 검열이란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 당연하지만, 검열이 있다 하더라도 거기에서 또 다른 문학적 효과가 발생한다. 예술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블랙리스트를 통한 문화예술지원사업 배제를 또 하나의 검열 사례로 추가해야 할 것 같다. 작년 ‘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사업 과정은 도무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통상 2월이면 발표되는 심의결과가 7월에나 발표되었고, 애초 100명으로 계획된 지원대상자가 30명이나 줄어들어 있었다. 블랙리스트 대상자를 배제하려니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응모작의 수준이 낮아서 지원자를 줄이느라 고심했다는 웃지도 못할 심사평이 붙어 있었다. 그 와중에 극작가 이윤택, 박근형에 대한 지원사업 배제, 지원사업 포기 종용 사례가 불거졌으며, 문화예술인들로 구성된 ‘예술인 연대 포럼’에서는 항의성명을 발표(2015. 10. 5)하기도 했다. 블랙리스트가 있다는 말이 돌았는데, 그 ‘물증’이 이번에 밝혀진 셈이다.

그런데 언론보도를 통해 ‘물증’을 접하고 보니 어이가 없어 허탈하기까지 하다. ‘세월호 시국성명’이나 특정 정치인 지지선언이 검열 대상이 되는 것도 말이 안 되지만, 공표된 명단을 그대로 블랙리스트에 ‘복붙(복사해 붙이기)’한 것을 보면 참 너무하다 싶다. 중복자를 체크하여 인원수를 산정하는 최소한의 성의조차 없다. 이런 성의 없는 리스트를 만들고, 그걸 배제한 지원대상자 명단을 만드느라 법석을 떨었을 관계기관 직원들이 안쓰럽기까지 할 지경이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의 저자’인지도, ‘레닌’과 ‘블라디미르’가 동일인물인지도 몰랐던 식민지 시기 검열관들은 영혼과 상식은 없어도 성실하기는 했다. 영혼과 상식이 없으려면 성의조차 없는 편이 오히려 낫다고 해야 할지.

세월호 이후 작가들이 얼마나 많은 분노와 슬픔과 자책 속에서 자신의 문학을 고심했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성명이나 선언은 그 ‘문학들’의 고심 중 극히 일부일 뿐이다. 그런 것을 읽을 줄 모르니 엉성한 리스트나 만들었겠지. 졸지에 무성의한 블랙리스트 명단에 이름을 올린, 혹은 원통하게 이름을 올리지 못한 예술가들의 기자회견(2016. 10. 18)장은 분노와 비판뿐 아니라 냉소와 풍자도 넘쳤다. 성실한 검열이든, 어설픈 검열이든, 그 검열에 저항하면서 또 다른 예술적 효과가 발생한다. 블랙리스트 국면의 문학도 나쁘지만은 않다.

서영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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