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영인의 책탐책틈
빛의 호위조해진 지음/창비(2017) 19대 대선 투표일에 이 글을 쓴다.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되던 날 아침 지하철 역 주변에서 울려나오던 선거방송에 괜히 마음이 뭉클했던 기억이 난다. 이걸 하려고 그간 그 많은 일을 겪었나 싶어서.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다. 진짜 뉴스, 가짜 뉴스, 인터넷 민심, 바닥 민심까지 온갖 말들이 난무했는데, 그럴수록 진실과는 점점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아니 이 과잉 미디어의 시대에 진실이란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조차 순간순간 묘연했다. 회고조의 말투에 주의하자. 다 지난 일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의 사건이 어제의 사건을 덮으며 시간이 흘러가고 있을 뿐이다. 그 사건들의 연속 속에서 나 자신을 조용히 돌아볼 여유조차 없는데, 하물며 타인을 읽는 일, 사람을 읽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후기에서 작가는 “이제야 나는, 진짜 타인에 대해 쓸 수 있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라고 썼다. 어떻게? 가령 오랫동안 아동들을 감금하다시피 하고 학대를 일삼은 아동보육원이 사회적으로 화제가 된 사건이 있었다.(‘작은 사람들의 노래’) 뉴스를 접한 사람들은 분노에 들끓었고 늘 그렇듯이 그러다가 사건은 잊혀져 갔다. 그 사건의 한중간에 있었던, 학대와 구타와 소외로 상처받은 누군가는 어떻게 되었을까. 타인의 일에 적절히 분노하고 적절히 공감하면서도 더 이상을 하지 않는 세간의 인심이라든가,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했던 그의 인생역정이라면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그를 이해할 수가 없다. 그의 외로움이나 상처가 어떻게 다시 그의 삶을 규정하면서 그를 얽어매는지. 자신의 불행을 방관했던 사람들을 증오하면서, 그러므로 타인의 삶에 절대로 관여하지 않는 스스로에 대한 혐오. 그러나 아들의 밥상을 차리는 어머니, 자식의 성장을 지켜주는 부모의 존재를 끊임없이 열망하며 거기에 기댈 수밖에 없는 모순. 조선소 작업장에서 추락하여 죽은 동료에 대한 애도조차도 함부로 꺼내 놓을 수 없는 자신에 대한 불신. 그리고 그렇게 외롭게 죽어가게 될 자신의 삶을 확신하는 끝없는 불안과 고독. 벗어날 수 없는 기억의 감옥에 감금된 그의 트라우마를 끝까지 들여다보는 일, 그가 동료를 위해 증언을 하고 자신의 고통을 통해 타인의 고통을 보는 일 같은 것은 영원히 일어나지 않는다 해도, 이미 잊혀진 사건 속에서 여전히 살아 꿈틀거리는 타인의 삶을 상상하는 일, 타인에 대해 쓴다는 것은 아마도 그런 일일 것이다. 작가는 “개인은 세계에 앞서고, 세계는 우리의 상상을 억압할 수 없다.”(‘동쪽 伯의 숲’)라고도 썼다. 세계에 함몰되지 않는 개인의 삶을 끝까지 상상하는 일. 내가 원하는 결말이나 세계에 대한 선의로 익숙하게 귀속되지 않는 삶의 낱낱을 오래 지켜보는 일. 타인을 읽는 일은 나를 읽는 일과도 통한다. 사건들로 치환될 수 없는 나 자신을 알기 위해서도 아직 더 많은 상상이 필요하다. 부끄러움이나 자책, 증오와 불신조차도 살아 있는 인간의 존엄이 되는 기적은 그렇게 온다. 서영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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