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7.15 19:50
수정 : 2016.11.01 10:50
[토요판]] 백기영의 미술교차로
(1) 마니페스타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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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비판 성격이 짙은 작품활동을 해온 크리스티안 얀코프스키는 유럽 도시들을 순회하며 격년제로 열리는 현대예술 축제인 ‘마니페스타’의 제11회 예술감독에 선정됐다. 그는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무엇을 하는가’를 올해 행사의 주제로 잡았다. 마니페스타11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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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난감 화살을 든 한 남자가 슈퍼마켓 장난감 진열대에 놓인 상품들을 ‘사냥’한다. 이 남자는 화살이 꽂힌 상품들을 태연하게 계산대로 들고 가서는 계산을 마친 뒤 유유히 슈퍼마켓을 떠난다. 미디어 비판 성격이 짙은 다수의 다큐멘터리와 사진작업, 퍼포먼스 등을 진행해오고 있는 크리스티안 얀코프스키(Christian Jankowski)의 <사냥>(The Hunt. 1992/1997)이 보여주는 영상이다. 이 작품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얀코프스키는 흔히 네오고딕 작가로 통한다. 중세 후기 서양에서 나타난 고딕양식과는 구분되는 이 동시대 미술의 흐름은 1997년 보스턴 현대미술관에서 크리스토프 그루넨베르크(Christoph Grunenberg)가 기획한 전시와 깊은 연관이 있다. 무언가 괴기하고 어둡고 공포스러운 것들을 주로 강조하는 작가들의 작업을 두루 아우르는 용어다.
초호화보트 ‘작품’ 판매
얀콥스키의 문제의식은 1999년 베네치아(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선보인 작품 <텔레미스티카>(Telemistica)에서도 빛났다. 내용은 이랬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방영되는 한 카드점쟁이 프로그램에 전화를 걸어 자신의 미래에 대해 더듬거리는 이탈리아어로 물었다. “나는 돈도 없고 가난한 예술가다. 내가 이번에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작가로 참여하는데 작품을 제작할 시간도 별로 없다. 내가 이번 전시에서 성공할 수 있을까? 또 내 인생에서 예술을 계속하는 것이 좋겠는가?” 카드 몇 장을 펼쳐놓은 점쟁이는 얀코프스키가 매우 성공할 것이며 이번 비엔날레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리라 예언했다. 현실에선? 과연 그 점쟁이 말대로 그는 지금 세계적으로 아주 유명한 예술가가 되었다.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용기를 얻은 얀코프스키는 좀 더 상업적이고 도박에 가까운 퍼포먼스를 고안해냈다.
때는 2011년. 얀코프스키는 영국의 프리즈 아트페어에 7500만유로짜리 초호화 보트를 가지고 나타나 ‘판매’에 나섰다. 실제로는 6500만유로에 살 수 있는 보트였다고 하니, 작가가 예술을 핑계 삼아 무려 1천만유로의 이득을 남기려 든 셈이다. <물 위의 가장 순수한 예술>(The Finest Art on Water)이라는 이름이 붙은 그의 ‘작품’을 사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나, 도리어 예술이라고 하면 무턱대고 천문학적인 숫자들이 오가는 미술시장의 현실을 비판한 작가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됐다. 다음 차례는 종교계. 미술시장을 ‘교란’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판단한 얀코프스키는 이번엔 종교계를 도마 위에 올릴 또 다른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같은 해, 그는 가톨릭 사제들을 모아놓고 예수그리스도를 가장 잘 연기하는 배우를 뽑는 캐스팅을 기록한 영상 <캐스팅 예수>(Casting Jesus)를 제작했다. 연기자들은 한결같이 거룩한 표정으로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종교적인 성스러움을 표현하려 노력하지만, 그는 외려 실망이 가득한 채 이를 바라보는 사제들의 표정을 잡아냈다. 이처럼 사람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종교, 돈, 예술과 같은 요소들은 얀코프스키 작업의 대표적 주제로 자리잡았다.
독일 출신 크리스티안 얀코프스키
유럽도시 순회 현대예술 축제인
‘마니페스타11’ 예술감독 선정
다다운동 출발점 취리히서 열려
미디어비판 성격 짙은 작품활동
돈에 취한 미술시장 현실 조롱
취리히 대표직종 1000개 추려
다양한 분야 종사자와 공동작업
얀코프스키의 이름은 올해 다시 한번 널리 회자되고 있다. 유럽 도시들을 순회하며 격년제로 열리는 현대예술 축제로 유명한 마니페스타 제11회 예술감독으로 그가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한번도 작가 출신을 감독으로 내세운 적이 없던 이 비엔날레 올해 행사는 6월 초 스위스 취리히에서 열렸다. 잘 알다시피, 취리히는 지금부터 꼭 100년 전인 1916년 다다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던 카바레 볼테르가 위치한 도시다. 얀코프스키는 올해 행사를 기획하면서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무엇을 하는가’(What do people do for the money)를 주제로 잡았다. 그는 취리히에서 대표적인 직업 1천개의 리스트를 추려 참여 작가 30명에게 선택하도록 했다. 소방수, 경찰견 조련사, 요리사, 목사, 애견 미용사, 인분처리업자, 요트 제작자, 운동선수 등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작가들과 함께 공동작업을 진행했는데, 그 결과물은 취리히 뢰벤브로이 쿤스트에 전시됐다. 작가들이 삶의 현장을 탐구하고, 삶의 현장으로부터 작업에 필요한 영감을 얻게끔 한다는 취지다. 때마침 기본소득 도입을 위한 국민투표가 스위스 전역을 달군 터라, 끝없이 진행되는 자동화와 로봇의 등장으로 인해 머지않아 사라질지도 모를 수많은 삶의 현장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역할 맞바꿔보는 프로젝트
이런 실험은 2008년 독일 슈트트가르트에서 진행했던 <업무회의>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 작업은 미술관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 진행했던 커뮤니티 프로젝트였다. 얀코프스키는 이 작업에서 미술관 종사자들의 업무를 서로 맞바꿔보도록 했는데, 역할 교환을 통해 새로운 유형의 창의성이 발휘되도록 하려는 의도였다. 온종일 폐회로텔레비전(CCTV) 화면을 들여다봐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미술관 회계 업무 담당이나 전시작품 지킴이 구실을 맡은 사람도 있다. 사람들이 각자의 역할을 바꾸었을 때 느끼는 당혹감은 이 프로젝트를 마치고 각자의 원래 위치로 돌아갔을 때 서로를 좀 더 잘 이해하는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고 한다.
스위스의 한 방송사는 “올해 취리히에서 가장 많은 외국인을 만날 거다. 그들은 관광객도 아니고 외국인 노동자도 아니며 예술가들이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도시 곳곳에서 마니페스타에 참여했던 작가들이 남긴 삶에 그을린 예술작품들을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삶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고 진정한 예술의 자유를 외쳤던 후고 발(Hugo Ball)의 카바레 볼테르는 이제 삶의 현장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서게 됐다. 올여름 취리히는 얀코프스키의 예술세계가 “슈퍼-얀코프스키”로 확장된 현장이다.
▶ 백기영 홍익대학교 회화과, 독일 뮌스터 쿤스트아카데미 영상미디어 석사 졸업. ㈔미술인회의 사무처장, 경기도미술관 학예팀장을 거쳐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부장으로 일한다. 뉴디스코스 아카데미 등에서 현대미술을 주제로 강의한다. 동시대 미술의 다양한 속성을 정치·경제·사회적 배경과 함께 전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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