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7.29 19:14
수정 : 2016.11.01 10:49
[토요판] 백기영의 미술 교차로
(2) 군터 뎀니히와 ‘걸림돌 블록’
|
베를린 태생의 행위예술가인 군터 뎀니히는 1930년부터 1945년 사이 베를린에 거주하다 나치에 희생된 사람들이 살았던 옛 장소에 그들을 기리기 위해 10×10㎝ 크기의 놋쇠로 만들어진 ‘걸림돌 블록’(슈톨퍼슈타인)을 설치했다. ‘걸림돌 프로젝트’ 누리집
|
지난달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 결정 이후, 전문가들은 세계가 민족주의와 보호무역주의에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고 우려한다. 이런 우려의 밑바탕에는 마치 1·2차 세계대전 사이에 불어닥쳤던 보호주의 열풍이 급기야 대공황으로 이어졌던 끔찍한 과거가 되풀이되지나 않을까 하는 공포가 깔려 있다. 실제로 자국민들의 일자리나 경제적 이익을 위해 외국인들을 배척·차별하는 움직임이 거세고, 실제로 문화나 인종 차이로 인한 폭력적 충돌도 차츰 잦아지는 중이다. 부조리한 역사 속에서 자행된 무고한 사람들의 희생을 벌써 잊어버린 것일까.
“세계에서 가장 긴 예술작품”
독일 베를린 시내 거리 곳곳을 걷다 보면, 콘크리트 블록 사이에 10×10㎝ 크기의 놋쇠로 만들어진 ‘걸림돌 블록’(슈톨퍼슈타인)이 놓여 있는 걸 종종 발견하게 된다. 이 걸림돌은 1930년부터 1945년 사이 베를린에 거주하다가 나치 당국에 체포돼 사라진 사람들이 살았던 집 앞이나 실종된 장소, 학교나 예배당 등에 설치돼 있다. 베를린 시내에만 7211개(2016년 통계)가 있고, 전 세계 20개국에도 6만개가 넘는 걸림돌이 마련됐다. 강제연행된 사람의 이름, 거주지, 출생 날짜와 세상을 떠난 장소와 날짜가 기록돼 있는 이 걸림돌에는 “그(혹은 그녀)가 여기에 살았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돌 위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도시에서 사라졌고 4만여개 시설에 집단수용됐다가 1938년의 저 악명 높은 ‘깨진 유리의 밤’(수정의 밤)을 분기점으로 산산이 부서졌다. 그들이 나치에 연행되어 갈 때, 그들의 이웃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타인의 삶에 무관심한 도시인들은 이 학살을 묵인함으로써, 결국 동조했던 건 아닐까?
베를린 태생 행위예술가 뎀니히
680㎞ 걸으며 동물 피 남기는 행위
나치에 희생된 집시들의 경로를
백묵으로 표시하는 프로젝트 진행
베를린 시내에 ‘걸림돌 블록’ 설치
“여기 살았다”, 나치 희생자 기억
“당신의 무관심이 학살 불렀다”는
반성의 계기 제공하는 게 기획의도
|
걸림돌에는 “그(혹은 그녀)가 여기에 살았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걸림돌 프로젝트’ 누리집
|
걸림돌 블록의 설치작가이자 행위예술가인 군터 뎀니히는 1947년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베를린과 카셀을 옮겨다니며 미술교육과 조형예술, 산업디자인 등을 전공한 그는 당대의 독일의 여러 작가들처럼 개념미술에 천착했다. 1968년 무렵의 초기 회화작품 ‘히로시마 그라운드 제로’에서 2차 세계대전이 인류에 끼친 재앙에 대한 문제의식이 엿보이기도 했으나, 가구나 산업디자인을 기반으로 한 그의 설치작업들은 주로 미니멀한 조형미를 추구하는 데 머물러 있었다. 빵 반죽으로 웅크리고 있는 사람을 표현한 ‘구워진 사람’ 조각(1976년) 등의 작업에 이르면서 지난 세기 인류가 저지른 잔혹한 역사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뎀니히는 1980년부터 개념미술을 기반으로 하는 퍼포먼스를 구상했는데, 그 첫 번째 작업이 ‘향기 흔적’이다. 이 퍼포먼스는 독일 중부 카셀에서부터 프랑스 파리까지 818㎞를 걸어 이동하면서 바닥에 텍스트 흔적을 남기는 작업이었다. 총 21일간에 걸쳐 진행된 이 퍼포먼스는 “세계에서 가장 긴 예술작품”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 그는 이 퍼포먼스 도중 프랑스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는데, 이 프로젝트의 의미와 허가서 등을 대조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치고서야 프로젝트를 완수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뎀니히는 이어 1981년에는 ‘혈흔’이라는 작업을 다시 기획했다. 이번에는 카셀에서 영국 런던까지 총 680㎞를 이동하는 작업이었다. 순수한 미술기관인 쾰른의 쿤스트페어아인을 거쳐 네덜란드의 반아베미술관을 지나 런던의 테이트갤러리로 이동하면서, 도살장에서 구입한 동물의 피의 흔적을 남기는 작업이었다. 그의 퍼포먼스는 자신의 몸에서 피를 뽑아서 드로잉을 한다든지 하는 식의 괴기한 짓거리를 하는 신체미술의 연장선에서 해석됐다.
이처럼 주로 오랜 시간 걷는 고행적인 여정을 통해 수행했던 뎀니히의 작업은 카셀에서 이탈리아 베네치아(베니스)까지 붉은 실을 늘어뜨리며 1000㎞를 이동하는 ‘아리아드네의 실’(1982)과 해류를 따라 카셀에서 미국 뉴욕으로 대양을 건너가는 ‘병 우편물’(1984) 등으로 확대됐다. 그의 문제의식이 결국 ‘걸림돌 블록’ 프로젝트로 연결될 수 있었던 계기는 1990년 쾰른에서 백묵을 활용해 1940년 당시 나치와 게슈타포에 연행됐다가 학살된 집시들(‘신티’와 ‘로마’)의 경로를 표시하는 프로젝트였다. 처음에는 기존에 그가 해왔던 퍼포먼스처럼 길바닥에 경로를 표시하는 작업이었으나 1993년엔 그들이 연행된 쾰른 시내 2곳의 장소 도로 바닥에 “1940 - 1000명의 신티와 로마인”이라는 금속 텍스트를 설치한 것이다.
시민단체의 적극적 후원
걸림돌 프로젝트는 비록 한 예술가에 의해 제안된 것이지만, 이런 아이디어가 시민사회 영역으로 확대될 수 있었던 것은 1983년 시민들의 발기로 설립된 ‘악티베스 무제움’(행동하는 박물관)의 역할이 컸다. 악티베스 무제움은 전통적인 개념의 미술관(박물관)이라기보다는 나치 희생자들을 애도하기 위한 전시, 포럼이나 연구 활동을 장려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민단체다. 이 단체는 군터 뎀니히의 프로젝트를 구체화할 수 있는 시민조직을 움직였고, 베를린을 12개 지역으로 나눠 걸림돌 블록의 주기적인 청소와 유지관리, 교체 작업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처리를 담당하고 있다. 또한 추가로 걸림돌을 설치해야 할 필요가 있는 희생자들의 자료를 찾고 연구하는 작업뿐 아니라, 중·고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 프로그램의 기획과 운영까지 도맡아 하고 있다. 특히 일일이 손으로 제작하느라 적지 않은 비용(개당 약 120유로)이 드는 탓에, 이 단체의 후원이 없었다면 아마도 뎀니히의 프로젝트는 성사되지 못했을 것이다.
|
군터 뎀니히는 1990년 쾰른에서 백묵을 활용해 나치와 게슈타포에 연행됐다가 학살된 집시들(‘신티’와 ‘로마’)의 경로를 표시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군터 뎀니히 블로그
|
그럼에도 걸림돌 프로젝트가 모든 사람들에게 환영받는 건 아니다. 유대인 세계대회의 부회장을 지낸 샤를로테 크노블로흐는 걸림돌이 길바닥에 설치돼 있어 희생자들의 이름을 사람들이 발로 밟고 다니게 하므로 또 다른 방식으로 희생자들을 학대하는 것이라 비판했다. 이런 비판에 대해 군터 뎀니히는 이렇게 반박했다. “나치에 동조한 독일인들의 무관심한 행동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학살됐다.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코 걸림돌 블록을 밟고 다닐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 행위보다 더한 메타포가 있을 수 있을까?” 하지만 그의 의도와 달리 도시 곳곳에서 걸림돌 블록이 파손되거나 스프레이로 칠해지는 등 극우세력들의 난동은 계속됐다. 2011년 한 해만 놓고 보더라도, 700건 이상의 파손행위가 버젓이 자행됐다.
▶ 백기영 홍익대학교 회화과, 독일 뮌스터 쿤스트아카데미 영상미디어 석사 졸업. ㈔미술인회의 사무처장, 경기도미술관 학예팀장을 거쳐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부장으로 일한다. 뉴디스코스 아카데미 등에서 현대미술을 주제로 강의한다. 동시대 미술의 다양한 속성을 정치·경제·사회적 배경과 함께 전달하고 싶다.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