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9.30 19:29
수정 : 2016.11.01 10:46
[토요판] 백기영의 미술 교차로
(6) 브렛 베일리의 ‘B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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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오달리스크>에서 등을 돌리고 거울을 들여다보는 여자가 거울을 통해서 관람객을 바라보고 있다. 아시아문화전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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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30일 법무부는 국내 체류 외국인의 수가 처음으로 200만명을 넘어섰다고 발표했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3.9%에 이르는 수치다. 또한 2007년 100만명을 돌파한 이래 10년도 채 되지 않아 그 수가 두 배 이상 늘어난 것이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급속도로 다문화 사회로 변화하고 있지만, 우리는 아직도 외국인들과 더불어 사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 듯하다. 국내에서 시행되는 대부분의 다문화 프로그램만 봐도 그렇다. 프로그램 이름에 ‘다문화’가 들어 있을 뿐, 정작 내용은 ‘한국 문화 알리기’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작 우리 국민들이 안고 있는 타문화에 대한 배타성을 성찰할 기회가 많지 않은 것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안산의 다문화 밀집지역 원곡동을 기반으로 아시아 문화를 학습하고 교류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일에 동참해 왔다. 예술가들이 진행하는 이런 작은 규모의 자발적인 활동도 중요하겠으나 국가 차원의 큰 그림이 절실하다고 여기던 중에, 마침 지난해 광주에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개관했다. 그러나 애초 아시아 문화교류의 중심이 되어줄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이 기관은 개관 후 얼마 되지 않아 급속도로 침체에 빠져들어갔다. 10년을 준비한 끝에 문을 연 이 어마어마한 문화기관이 개관한 지 불과 1년 만에 개점휴업 상태에 빠져든 것이다. 사업의 추진 주체였던 문화체육관광부의 의지가 의심스러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나마 총 5개의 사업 중 아시아예술극장의 프로그램만큼은 우리 사회의 다문화 현상의 허구적 실체를 되짚어 보게 하는 의미 있는 것이었기에, 여기서 소개해 보려 한다.
입구 안내 맡은 흑인 유학생
아시아예술극장이 진행했던 공연 프로그램들 가운데 브렛 베일리의 ‘B 전시’는 그간 내가 갖고 있던 고민을 예술작품으로 잘 표현해준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극장의 프로그램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공연 형식을 뛰어넘어 자유분방하게 진행됐다. 공연장에 편안하게 앉아서 공연이 끝날 때까지 수동적으로 관람하는 전통적인 형식의 공연이 아니라, 관람객이 적극적으로 이동하면서 공연에 참여하게끔 했다. ‘B 전시’라고 일컫는 이 전시는 30분마다 정해진 숫자의 관람객들만 입장하게 되어 있었는데, 공연이었기 때문에 하루에 4회로 한정했다. 5·18 민주평화기념관(구 전남도청)을 통째로 활용한 이 공연은 지하에서부터 시작됐다. 검표가 끝나자 한 아프리카 유학생(그녀의 이름은 ‘콘스탄스 나누에르키에 노이’였다)이 나와서 관람객을 안내했다. 그녀는 우리에게 순서대로 번호표를 나누어 주면서 전시장을 이동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주의사항을 떠듬거리는 한국말로 설명했다. 그녀의 어눌한 한국어 실력도 그렇지만, 효율적인 행사진행을 위해서도 왜 하필 한국에서 유학하고 있는 학생에게 안내 역할을 맡겼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나를 비롯한 관람객들은 말없이 그녀의 안내를 받아 계단을 올라갔다.
전시장에 들어서니 마치 인류학 박물관 입구 같은 첫 번째 공간 <원주민의 문명화 #2>가 나타났다. 입구에 동상들이 세워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장소를 지나가다가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무심코 지나치려고 했던 입구에는 조형물도 아니고 마네킹도 아닌 실제 살아 있는 사람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철가면 속에 있던 흑인 전사의 눈이 깜빡이고 있었는데, 이 전시는 18세기 파리에서 열린 ‘식민지 인간 전시관’을 재현한 것이다. 18세기 당시 식민지에서 잡아온 사람들을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처럼 박물관에 세워 놓고 구경거리로 만들었던 바로 그 전시 말이다. 두 번째 방에서는 한술 더 떠, 벨기에 레오폴드 국왕 앞에 콩고 주민의 잘린 오른손이 바구니에 가득 들어 있었다. 이 두 번째 방 <원주민의 문명화 #3>을 지나면 회전하는 무대 위에 서 있는 소녀 <사라진 연결고리>가 나오고, 원주민을 학살했던 두 개의 코너 옆에 여섯 번째 방인 <피셔 박사의 호기심의 방>에 도착하게 된다. 이 방에는 하얀 상자 네 개에 머리만 내놓고 관람객을 바라보며 노래하는 여성들이 보였고, 그들 뒤로는 참수된 머리 사진 세 개가 액자에 담겨 있었다. 노래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는 슬픔에 가득 차 있었다.
아시아문화전당의 ‘B 전시’ 공연
전통 형식 탈피해 관람객이 이동
18세기 ‘식민지 인간전시관’ 재현 등
인종차별 현실 고발하는 데 중점
“피부색 제약 없는 세상 살고파”
“역사책에서 제외된 것 보여줘”
참가자 상당수는 한국 거주 흑인
직접 경험한 인종주의 편견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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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공간 <원주민의 문명화 #2>에는 마네킹이 아닌 실제 살아 있는 사람이 서 있다. 이 전시는 18세기 파리에서 열린 ‘식민지 인간 전시관’을 재현한 것이다. 아시아문화전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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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방들을 지나면 등을 돌리고 거울을 들여다보는 여자가 있는 방 <블랙 오달리스크>를 만나게 되는데, 그녀는 거울을 통해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볼 수 없었다. 여덟 번째 방은 붉은 황토를 바른 여자와 남자가 서 있는 <종의 기원>, 그리고 아홉 번째 <발견된 오브제 #1>에는 2010년 소말리아 모가디슈에서 한국에 망명을 신청하고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망명신청자가 있었다. 우리나라의 난민 인정률은 3.8%(지난해 통계 기준), 아프리카계 난민의 인정률은 더욱 낮다.
열두 번째 방에는 한 사람이 의자에 앉아서 액자를 하나 들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케냐 사람인 파올로 무오카 은젤리가 영국 식민통치 당시 무장 독립운동 단체 ‘마우마우’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구치소에 수감된 뒤 다른 수감자들이 보는 앞에서 거세당하는 형벌을 받는 내용을 고발하는 사진이 담겨 있었다. 열세 번째 방 <분리발전>에는 철조망 건너편에 앉아 있는 한 사람이 등장했다. 그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카렐 제임스 피테르선을 상징했는데, 당시 인구등록법에 따라 유색인종으로 분류되었으며, 그의 어머니는 백인 혼종결혼금지법에 따라 결혼무효 판정을 받았고, 강제 이주를 당하는 차별을 받아야 했다. 마지막으로 열네 번째 방 <장자생존>에는 마리암 게투하고스니그니가 프랑스 샤를 드골 공항에서 요하네스버그로 강제 이송을 거부하던 중 프랑스 경찰에게 질식사당한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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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 방인 <피셔 박사의 호기심의 방>에는 하얀 상자 네 개에 머리만 내놓고 관람객을 바라보며 노래하는 여성들 뒤로 참수된 머리 사진 세 개가 액자에 담겨 있다. 아시아문화전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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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으로 성장한 다문화 2세대
모든 전시를 보고 나서 마지막으로 만나는 방에는 이 프로젝트에 참가한 사람들의 인터뷰와 후기가 전시되고 있었다. 레티시 랄레미 비에네는 “나는 피부색의 무게에 제약받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고 털어놨고, 알렉상드르 팡다르는 “‘B 전시’는 역사책에서 제외된 것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 참가자들의 후기를 둘러보다가 충격적인 사실을 다시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 공연의 참가자 중 상당수가 한국에서 실제로 생활하고 있는 흑인들이었던 것이다. 그제야 비로소 왜 우리가 입구에서 콘스탄스 나누에르키에 노이의 안내를 받아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광주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평범한 유학생으로, 이 전시의 일부였던 셈이다. 또한 이 공연에 참가한 흑인 공연자들은 한국 사회에서 자신들이 경험한 인종주의적 편견에 대해서도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본인들이 한국 사회에서 직접 겪었던 경험들이 그들로 하여금 이 공연에 참여하도록 만들었다고 한다. 나는 전시를 보는 내내 서양인들의 폭력적인 인종주의에 대해 분노하면서도 정작 우리 사회에 만연한 인종주의를 돌아보지 못했던 사실이 부끄러웠다. 이미 우리 사회도 다문화 가정의 2세들이 성인으로 성장해 어엿한 구성원이 된 지 오래다. ‘B 전시’는 이제는 우리도 미국이나 유럽에서나 벌어지는 것으로만 여겼던 인종갈등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가 되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게 해준, 의미 있는 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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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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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기영 홍익대학교 회화과, 독일 뮌스터 쿤스트아카데미 영상미디어 석사 졸업. (사)미술인회의 사무처장, 경기도미술관 학예팀장을 거쳐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부장으로 일한다. 뉴디스코스 아카데미 등에서 현대미술을 주제로 강의한다. 동시대 미술의 다양한 속성을 정치·경제·사회적 배경과 함께 전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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