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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11.11 19:17 수정 : 2016.11.11 19:57

[토요판] 백기영의 미술 교차로
(9) 프랑시스 알리스의 ‘헛수고’ 프로젝트

프랑시스 알리스의 <그린 라인>은 예루살렘에서 총 58리터의 물감을 들고 24㎞를 걸어 이동하면서 길 위에 흔적을 남기는 퍼포먼스다. 그가 물감을 흘리며 걸었던 길은 중동전쟁 이후 이스라엘이 확정한 예루살렘의 휴전선이 위치해 있는 곳으로, 그는 이 작업에 ‘때로는 시적인 행동이 정치적이 될 수 있고, 때로는 정치적인 행동이 시적이 될 수 있다’는 부제를 붙였다. 프랑시스 알리스 누리집 갈무리

1997년 여름 한 남자가 얼음덩어리 하나를 밀면서 9시간 동안 멕시코시티를 가로지르는 ‘헛수고’를 감행했다. <방식의 역설>이라는 제목의 이 퍼포먼스는 1959년 벨기에에서 태어나 1980년대 중반부터 멕시코에서 생활하고 있는 프랑시스 알리스의 작업이었다. 그가 밀고 다닌 얼음덩어리는 퍼포먼스가 끝날 무렵에는 조그맣게 줄어들어 급기야는 물방울 자국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이 허무해 보이는 퍼포먼스는 오랜 시간 중노동을 하면서 살아가지만 그에 준하는 대가를 지급받지 못하는 멕시코의 보통사람들의 삶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자 한 것이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빈부격차가 가장 큰 나라인 멕시코는 스페인 식민지 시절부터 시작된 인종차별로 인한 폐해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프랑시스 알리스는 이처럼 매우 정치적인 이야기들을, 너무나 황당해서 시적이기까지 한 무위적인 퍼포먼스나 개념미술로 풀어내는 작가다.

500명이 삽질해 모래언덕 5㎝ 옮겨

그는 이처럼 도시를 걷거나 배회하는 행위를 통해서 정치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업을 여러 번 선보였다. <컬렉터>라는 제목의 퍼포먼스는 강아지 모양의 자석 장난감을 끌고 도시를 배회하면서 도시에 널려 있는 쇠붙이들이 이 장난감에 들러붙는 것을 기록하였고, <그린 라인> 퍼포먼스는 예루살렘에서 총 58리터의 물감을 들고 24㎞를 걸어 이동하면서 길 위에 흔적을 남기는 작업이었다. 그가 물감을 흘리며 걸었던 길은 중동전쟁 이후, 이스라엘이 확정한 예루살렘의 휴전선이 위치해 있는 곳이었다. 그는 이 작업에 ‘때로는 시적인 행동이 정치적이 될 수 있고, 때로는 정치적인 행동이 시적이 될 수 있다’는 부제를 붙였다. <동화>라는 제목의 또 다른 퍼포먼스에서는 자신이 입고 있는 스웨터의 실을 풀면서 걷는 작업을 선보이기도 했다. 프랑시스 알리스에게 있어서 ‘걷기’는 ‘목적지 없는 유목 상태’에 가깝다. 노동을 통해 사회적 발전을 도모하는 행위가 존중받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릴없이 도시를 배회하거나 무의미해 보이는 상념에 빠져 있는 그의 행위는 그저 무능을 실천하는 것처럼 보인다.

페루의 리마에서 수행했던 <믿음이 산을 옮길 때>는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가르침에서 따온 작업이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만약 믿음이 있다면, 이 산더러 저리로 가라고 하면 옮겨질 것이다’라고 가르쳤는데, 그는 이 종교적 믿음을 실천하기 위한 황당한 프로젝트를 기획했다. 프랑시스 알리스는 리마 대학의 청년 자원봉사자 500명을 모아 삽으로 산을 퍼 나르는 퍼포먼스를 감행했다. 이들이 참여한 퍼포먼스는 동산만한 크기의 언덕 아래에 모여서 나누어 받은 삽으로 모래를 퍼 올려 정상까지 도달하는 공동 작업이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500m 너비로 늘어선 참가자들은 땀 흘려 모래들을 퍼 올리는 노동을 통해서 모래언덕을 5㎝ 정도 뒤로 옮기는 일을 해냈다. 사실 바람만 조금 세게 불어도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을 많은 사람을 동원해 ‘헛수고’를 하게 한 것이다. 참가자들은 이 황당한 퍼포먼스가 사회적 정서를 표현하고 자신들이 처해 있는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입을 모았다. 이처럼 그는 ‘가장 많은 노력으로 가장 적은 성과’를 얻어내는 일을 예술로 수행해냈다. 프랑시스 알리스는 이 작업에 대해 “무언가를 하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고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무언가를 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벨기에에서 태어난 프랑시스 알리스
멕시코·페루 등 남미를 근거지로
일상의 행위에 초점 맞춘 작업 진행
‘황당해서 시적인’ 무위의 퍼포먼스

이스라엘이 정한 예루살렘 휴전선
물감 들고 24㎞ 걸으며 흔적 남겨
옛소련 ‘라다’ 자동차 충돌 장면을
동구권 몰락 재현의 모티브 삼기도

그는 이제 베네치아(베니스) 비엔날레, 카셀도쿠멘타, 이스탄불 비엔날레 등 대표적인 미술행사에 단골로 초대되는 인기 작가 중 하나다. 그가 2014년 마니페스타(유럽 현대예술 축제)에 참여해서 선보였던 영상작업은 동구권의 몰락을 연상시키는 ‘자동차 사고’를 퍼포먼스로 재현했는데, 당시 전시는 유럽 통합을 문화영역 안에서 실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의 작업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박물관 겨울궁전으로 들어가는 정원에 설치되었는데, 자동차 한 대가 나무를 들이받고 멈춰 서 있는 형국이었다. 이 자동차는 1980년대 소비에트연방에서 제조되어 서유럽권에 판매되었던 녹색 라다 리바(Lada Riva) 1500이었다. 그는 30여년 전 동생과 함께 무작정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났던 여행길에서 같은 회사의 자동차가 독일 국경을 얼마 벗어나지 못하고 멈추어 섰던 기억을 되살리고 있었다. 그는 이 작업을 기록한 영상에서 “끝이 없다면 시작도 없습니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의 작업은 광장을 지나 공원을 가로질러 들어오던 자동차가 굉음과 함께 멈추는 장면으로, 세 개의 서로 다른 시점에서 영상으로 기록되었다. 역사적 사건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매우 다르게 해석되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500m 너비로 늘어선 참가자들이 땀 흘려 모래들을 퍼 올리는 노동을 통해서 모래언덕을 5㎝ 정도 뒤로 옮기는 일을 해낸 <믿음이 산을 옮길 때> 퍼포먼스 장면. 프랑시스 알리스 누리집 갈무리

13㎞ 떨어져 유럽-아프리카 나뉜 두 도시

광장을 가로질러 여름궁전을 지나 겨울궁전으로 들어오던 낡은 자동차는 정원의 가로수 사이를 달리다가 “꽝!” 하고 나무를 정면으로 들이받고 먼지를 내면서 멈춰 섰다. 다시 반복되는 영상에서는 우측면의 백미러 사이로 광장의 풍경이 뒤로 사라지면서 위험한 속도로 여름궁전에 들어선 자동차가 나무들을 비켜 지나다가 “꽝!” 하는 충격에 크게 흔들리다가 멈춘다. 반복되는 굉음은 그때마다 다른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 영상은 그가 1992년 ‘걷기’ 작업에서 발표했던 26개의 텍스트를 연상시켰다. 그는 텍스트에서 ‘내가 걷는 한 나는 ( )하지 않는다’는 식의 문장을 반복했는데, 예를 들면 ‘내가 걷는 한 나는 선택하지 않는다. 내가 걷는 한,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내가 걷는 한, 나는 만들지 않는다’ 등 반복되는 상념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는 이런 일상의 무위적인 행위들을 예술과 뒤바꾸어 놓는 것을 즐겼는데, 1996년에 제작된 그의 또 다른 작업 <만약 당신이 전형적인 관객이라면, 당신이 정말로 하고 있는 것은 사건이 발생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에서는 광장에서 발견한 작은 생수병 하나가 사람들의 발에 걷어차이면서 이리저리로 이동하다가 급기야는 자동차들이 달리고 있는 도로에 떨어져 구른 뒤 자동차 바퀴에 치이고 마는 광경을 기록한 영상이었다. 이 영상을 주시하고 있는 전형적인 관객(?)으로서 나는 생수병이 박살나는 광경을 아슬아슬한 심정으로 재촉하고 있었다.

그의 작업은 두 개의 축이 서로 마주하고 있거나 한 축으로 방향을 옮겨 가거나 때로는 하나가 다른 하나를 대체하는 방식으로 구성된다. 대표적인 작업이 2012년에 제작된 <미라도레스>이다. 이 영상작업에는 모로코의 항구도시 탕헤르와 스페인 남부의 타리파가 지중해를 마주하고 서로 바라보고 있는 장면이 담겨 있다.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13㎞ 떨어진 두 도시는 지난 몇 세기 동안 한쪽은 아프리카로, 다른 한쪽은 유럽으로 문명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충돌해 왔다. 이 작업이 있기 전인 2010년에 선보인 <워터컬러>라는 작업에서 이미 그의 문제의식은 뚜렷하게 드러났는지도 모른다. 흑해에 접해 있으면서 아시아 무역의 거점이었던 터키의 도시 트라브존에서 물을 퍼다가 홍해를 마주하고 있는 요르단의 도시 아카바의 바다에 섞는 퍼포먼스 말이다.

백기영
▶ 백기영 홍익대학교 회화과, 독일 뮌스터 쿤스트아카데미 영상미디어 석사 졸업. ㈔미술인회의 사무처장, 경기도미술관 학예팀장을 거쳐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부장으로 일한다. 뉴디스코스 아카데미 등에서 현대미술을 주제로 강의한다. 동시대 미술의 다양한 속성을 정치·경제·사회적 배경과 함께 전달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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