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11.25 19:30
수정 : 2016.11.25 19:52
[토요판] 백기영의 미술 교차로
(10) 빅 판데르폴의 ‘삼생가약’(三生佳約)
|
네덜란드의 듀오 작가 빅 판데르폴이 기획한 <삼생가약>(三生佳約)은 게스트 큐레이터 6명이 서울시립미술관에 소장된 작품 중 일부를 바탕으로 자신들이 생각하는 미술을 표현하도록 하는 프로젝트다.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
문화체육관광부가 2년에 한번 실시하는 ‘문화예술 향유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이 조사가 처음 시행된 2003년 이래로 지금까지 우리 국민의 연간 미술관 전시 관람 횟수는 0.2회로 전혀 변화하지 않았다. 이 수치는 연간 5~6회 이상을 기록하고 있는 영화 관람에 비하면 매우 낮다. 이쯤 되면 우리나라에서 ‘미술’이라는 영역은 시민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거나 절대적인 소용가치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오늘날 미술관의 ‘관람객’은 누구인가? 미술관에서 관람객의 시선은 환영받지만, 그들의 신체와 존재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관람객은 늘 익명적이고 실체가 없는 존재로 유령처럼 전시장을 배회하다가 사라진다.
아이러니하게도 공공미술관의 정책을 결정할 때면 관람객이 늘 다시 전면에 등장한다. 일반적으로 관람객은 미술에 대해서 무지하지만 관심이 많은 문외한으로 이해된다. 그들은 교육 수준이 낮은 주부이거나 고령의 노인들이거나 예쁜 색깔의 그림을 좋아하는 어린이들로 대표된다. 그러면서 그들은 ‘시민’ 혹은 ‘민중’의 다른 이름으로 공공정책을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시는 절대 어려워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난해한 전시는 그들을 모독하는 오만한 행동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 안에서 미술관은 지식정보사회의 다양한 문화들과의 경쟁에서 점점 더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이처럼 수동적인 관람객을 미술관이 수행하는 구체적인 프로젝트에 창조적으로 참여하게 한 프로젝트가 있다.
과정형 설치작업의 하나
지난주에 막을 내린 서울시립미술관의 세마(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 서울’ 전시장 입구에는 설치가 진행 중인 상태로 작품들이 포장된 채 진열되어 있는 광경이 펼쳐졌다. 미술관 수장고 정리 중에 소장품들을 밖에 내놓은 것 같은 풍경이었다. 포장된 작품들 사이에 설치되어 있는 비디오 모니터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프로젝트가 과정형 설치작업의 일환임을 알 수 있었다. 이 작업은 네덜란드의 듀오 작가 빅 판데르폴이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관람객과 함께하는 전시 <삼생가약>(三生佳約)이었다. <삼생가약>은 ‘삼생을 두고 끊어지지 않을 아름다운 언약’이라는 뜻의 고사성어로, 이 프로젝트는 미술관의 소장품을 활용하여 초대받은 게스트 큐레이터(마정연 미디어 연구자, 정소연 SF소설가, 윤경희 불문학자, 박현정 미술작가, 장준환 영화감독, 김연용 미술작가) 6명의 전시를 릴레이로 오픈하는 것이었다.
SeMA 비엔날레 ‘미디어시티 서울’
미술관 소장품 중 139점 선별해
게스트 큐레이터 6명이 꾸미도록
‘자신들이 생각하는 미술’ 표현
미디어 연구자와 SF소설가,
불문학자와 영화감독 등 다양
관람객에게 전시의 권한 위임하며
익명성에 머물던 관람객을 주체로
이 프로젝트를 위해서 빅 판데르폴은 서울시립미술관에 있는 총 4348점의 소장품 중 139점을 선별해 게스트 6명에게 제안한 뒤, 이를 바탕으로 각자가 생각하는 전시를 꾸미도록 했다. 그동안은 미술관의 큐레이터가 기획해 놓은 전시를 수동적으로 관람만 해왔던 참가자들은 각자 자신들이 생각하는 미술에 대한 생각들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빅 판데르폴은 참여자들에게 작품을 선정하는 기준으로, 첫째, 한국 현대미술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작가와 작품인지를 고려하고, 둘째, 이번 비엔날레의 주제인 재난, 과학소설의 상상력, 노스탤지어와 유토피아의 상관력, 세계의 미래상과 연결점이 있는지 생각해보도록 했다. 셋째로는 서울이라는 지리적 위치, 역사적 배경과 연관이 있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특정 이야깃거리를 내포한 작품인지도 중요한 점검 사항 중에 하나였다.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마정연씨는 일본에서 미디어 아트를 전공한 연구자다. 그는 미디어 연구자답게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미디어 아트 작품들과 백남준의 작업에 관심을 보였다. 최우람, 노순택, 백현진 등의 작품을 이용해서 전시를 꾸민 마정연은 “미래의 미술관에서 구체적인 물질, 혹은 그 물질이 담고 있거나 물질에 잠시 몸을 기대고 있는 비물질적인 데이터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고 한다. 또다른 참여자인 정소연씨는 에스에프소설가다.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 개인들의 이야기를 비틀어 보여주기 때문에, 자신을 에스에프소설가라고 말하는 그는 자신이 손님이 아닌 미술관의 참여자로 올 수 있었던 것에 대해 흥미로워했다. 그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작품을 선별했는데, 처음에는 자신의 소설을 이미지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어떤 것은 단지 보기 좋고 작품을 꺼내서 보여주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선택했다. 여기서 특유의 비틀림이 발생했다. 그는 자신의 전시가 관람객들이 일상에서 흔하다고 생각하던 것을 다르게 보도록 하고 싶었다고 했다.
|
<삼생가약>은 그간 익명성 속에 숨어 있던 관람객들 각자가 실은 자기 전문성을 지닌 엄연한 창작 주체임을 일깨워준다.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
미술관과 도서관의 생명력
세번째 참여자는 대학에서 언어학과 문학을 공부하고 미국과 프랑스에서 비교문학을 전공한 윤경희씨였다. 그는 예술작품들이 쌓여 있는 수장고에서 잠을 자는 행위를 매우 에로틱한 욕망이라고 표현하면서 그것과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것의 다른 표현이라고 덧붙였다. 주어진 139점의 작품은 생각보다 많았는데, 그는 이 리스트에서 무엇을 뺄 것인지를 먼저 결정했다고 한다. 미술관의 미래를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도서관을 떠올린다는 그는 작품과 자료가 개방되어 있어서 이용자를 환대하는 것이 이 두 기관의 생명력을 좌우한다고 말했다.
네번째 참여자는 회화를 전공하고 최근 신생공간에서 청년작가들과 전시도 기획하는 박현정씨였다. 그는 구동희, 정서영, 김인배, 공성훈의 작업을 골라 설치했는데, 선별의 원칙은 한 번에 독해되지 않는 작업을 위주로 골랐다고 한다. 서로 추상적인 것들을 시각화하고 네 점의 작품이 하나의 공간 안에 서로 마주보거나 나란히 놓으면 서로 간에 상호작용을 할 수 있도록 배치했다고 한다. 결국 자신이 만든 전시는 독해가 빨리 되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수상하다는 감정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다섯번째 참여자는 장편영화 <지구를 지켜라>와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의 영화감독 장준환씨였다. 그는 비엔날레의 주제 ‘네리리 키르르 하라라’라는 화성인의 언어에서 착안한 ‘화성인의 수장고 습격 사건’을 주제로 전시를 만들었다. 여섯번째 참여자는 작가 김연용씨였는데, 그는 빅 판데르폴이 제안한 139점 전체를 전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이를 통해서 제한된 전시 공간을 활용해야 하는 미술관 실무진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결정을 해나가는지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 전시를 기획한 빅 판데르폴은 관람객에게 전시의 권한을 위임하면서 익명화되었던 관람객이 이름을 얻게 했다. 즉 관람객이 단지 주부이자 어린이이자 노인이 아니라, 그들 각자가 실은 구체적인 자기 전문성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전시를 기획한 것이다. 관람객을 바라보던 우리의 미술관 제도와 시각에 창의성을 발휘한 중요한 사례가 아닐까.
※‘백기영의 미술 교차로’ 연재를 마칩니다. 좋은 글 보내주신 필자와 이 코너를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 백기영 홍익대학교 회화과, 독일 뮌스터 쿤스트아카데미 영상미디어 석사 졸업. ㈔미술인회의 사무처장, 경기도미술관 학예팀장을 거쳐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부장으로 일한다. 뉴디스코스 아카데미 등에서 현대미술을 주제로 강의한다. 동시대 미술의 다양한 속성을 정치·경제·사회적 배경과 함께 전달하고 싶다.
광고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