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6.07.28 19:21 수정 : 2016.12.12 09:41

박이은실의 지리산 책읽기

‘벌레’라는 말을 쓰는 것이 오해를 일으킬 수도 있는 일이 되어버린 참으로 하 수상한 시절이다. 그렇지만 이 글은 한 마리의 정체 모를 벌레가 내게 상기시킨 것에 관한 이야기다.

녀석은 그날 내 침대 머리맡 위쪽 벽에 붙어 있었다. 큰 산이 가까운 산자락 동네로 귀촌한 지 오래되지도 않기에 아직은 여러 가지가 서툰 와중의 일이었다. 자정이 넘은 시간에 불현듯 마주한 녀석의 모습은 입이 절로 벌어지고 몸이 굳을 만큼 내게는 기괴했다. 처음엔 길쭉한 나뭇가지 모양이었던 그것은, 자세히 보니 거미줄처럼 가느다란 다리가 네 개나 달려 있었다. 낯설고 기괴했다. 엄습해온 공포로 나는 움직이는 것조차 힘들었다.

녀석의 기괴한 모습 때문은 아니었다. 분명히 나뭇가지인데 나뭇가지가 아닌, 생명체로는 보이지 않는데 다리가 네 개나 달려 있는 존재. 그 모호한 미지의 상태로 인해 생긴 공포였다. 그것은 일종의 경계 붕괴 상태에서의 공포였다. 경계가 모호해 대응 매뉴얼이 없는 상태에서의 반응이었다. 정체를 파악할 수 없다는 공포, 그런 나의 무능력에 대한 공포, 이 상황이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함, 그 해결을 당장 내가 해내야 한다는 외로움….

어찌어찌해서 그날 밤 녀석을 벽에서 떼어내 집 밖으로 내보낸 후 한 며칠 수소문을 했다. 녀석은 청정지역에서만 살고, 직접 보기는 어려운 ‘대벌레’라고 했다. 그렇게 녀석에 대한 지식을 얼마간 수집하는 동안 나는 녀석과 또다시 마주쳤다. 실외 벽에 붙어 있는 녀석을 보자마자 이번에는 가까이 다가가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불과 얼마 전 첫 조우 때 온몸에 털이 곤두서는 공포를 겪었던 나와 다른 나였다. 그처럼 급속히 달라진 반응이라니. 그 밤의 그 공포는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왜 사라진 것일까?

문화란, 경계를 만들고 낯선 것을 한 경계 안으로 밀어넣은 뒤 낯섦과 그로 인한 공포를 봉합해 마음의 평화를 얻는 인간 행위들의 총합인지도 모른다. 그 경계를 만들어내는 의미와 개념의 지도를 공유하는 이들의 묶음을 ‘문화적 동류집단’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인류학자 미셸 짐발리스트 로잘도를 포함한 14명의 인류학자들과 2명의 여성학자들이 쓴 논문들을 묶어 오래전 출간한 <여성, 문화, 사회>는 바로 그 ‘문화’를 치열하게 질문하는 책이다. 제목에서 이미 짐작할 수 있듯이 ‘여성’이라 불리는 존재가 독해되어온 오랜 역사가, 사실은 매우 틀린 가정, 편협한 개념, 수많은 봉합된 경계 들을 전제한 것이었음을 다양한 인류학적 근거와 이론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나의 공포감이 사라진 것은 그 녀석이 대벌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 아닌가? 그런데 그것은 단지 인간의 자의적 규정일 뿐, 대벌레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지식 아닌가? 대벌레가 대벌레인 이유는 누군가가 규정하고 호명하기 때문 아닌가? 거기에는 이미 불평등한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가?

남성이란 무엇이고 여성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생물학적 차이에 대한 질문이 아니다. ‘해석’에 대한 질문이다. 상징체계와 지식, 그리고 권력에 대한 질문인 것이다. 이 책이 1974년에 제기했던 인류학적 질문들은 2016년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내가 대벌레를 대벌레로 부르건 말건 대벌레는 그 자신 그대로 살아왔고 살아간다. 미지의 존재에 대한 공포는 대벌레와 무관한, 바로 나의 것이다. 혐오의 시대, 쏟아지는 말들 속에서 길을 잃을 것만 같다면 내 밖이 아니라 내 안의 공포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특히, 지금 당신이 누군가를 혐오할 수 있는 권력의 위치를 누리고 있다면 말이다.

박이은실 <여/성이론> 편집주간


<여/성이론> 편집주간. <월경의 정치학>을 썼으며, <페미니즘의 개념들>, <성·노·동>을 함께 썼고, <퀴어이론 입문>을 번역했다. 여성문화이론연구소와 지순협 대안대학에서 일하고 있으며 최근 지리산 자락 마을, 산내로 삶터를 옮겨 조용히 섞여들어 살기 위해 애쓰는 중이다.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박이은실의 지리산 책읽기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