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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10.27 19:29 수정 : 2016.12.12 09:42

박이은실의 지리산 책읽기

<인간의 조건>에서 한나 아렌트는 탄생하고 절멸하는 인간의 조건에 대해 논하며 노동, 작업, 행위라는 활동은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 해야 하는 세 가지 필수 활동이라고 말한다. 이때, ‘노동’은 자기 신체와 인류 전체의 생존에 상응하는 활동이자 그저 단순히 유기체를 유지하기 위한 활동이다. 노동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행위보다 덜 인간적이다. 아렌트는 행위 중의 행위는 바로 정치라고 보았다. 이런 맥락에서 영어에서 출산을 뜻하는 laboring과 노동을 뜻하는 labor가 같은 뿌리라는 사실은 그러므로 의미심장하다.

서구에서 근대 학문 중 하나로 탄생한 생물학은 인간을 포유(哺乳)류로 분류하였다. 포유류란 새끼를 낳아 젖을 먹여 기르는 동물류라는 뜻이다. 말 그대로를 놓고 보면 남성은 이에 속하지 않는다. (생물학적 의미에서의) 남성은 새끼를 낳지도, 젖을 먹이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성이 포유류라는 동물계에 속한 인간인 반면, 남성은 동물계를 벗어나 인간계에만 속하는 인간인 셈이다. 많은 문화권에서 여성이 월경과 출산을 하고 젖을 먹이는 존재라는 이유로 동물계에 가깝고 따라서 온전한 의미의 인간으로서 남성과 동등하게 대우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많은 인류학 연구물들이 비판적으로 밝혀왔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여성은 노예보다 조금 나은 위치에 있었을 뿐인 한낱 이등시민으로서 시민남성이 결코 사랑할만한 가치조차 없었다. 그런 여성이 유럽에서 시민 남성의 진정한 생애 동반자로서 신분격상이 된 시기는 정치권력과 경제적 부의 축적을 위해 건강한 인구의 생산이 중요해지기 시작한 때와 일치한다. 그러나 이 또한 여성인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을 생산하는 인간생산자로서의 위치에서 가지게 된 지위였다.

출산파업과 저출산이 사회적 사안이 된 시대, 서울의 지하철에는 임산부 배려석이 등장했다. 분홍색 좌석 앞 바닥에는 ‘내일의 주인공을 위한 자리입니다’라는 글귀를 적어놓았다. 말 그대로 임산부 배려석은 임산부가 아니라 태아를 위한 것인 셈이다.

2012년 8월, 헌법재판소는 임신중절을 택한 여자친구와 여자친구를 도운 조산사를 고발해 해당 여성과 조산사를 유죄판결 받게 한 남성의 손을 들어주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판결의 근거는 여성의 선택은 ‘사익’에 근거하고 여성의 의사에 반한 남성의 고발은 ‘공익’에 이바지한다는 것이었다. ‘이익’, ‘사적 이익’, ‘공적 이익’ 등은 그 규정에 있어 치열한 정치적 논쟁이 필요한 정치적 언어다. 그전에 무엇보다 여성의 임신 유지와 출산이 해당 여성 개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남성 개인과 남성 개인이 대표하고, 남성 개인을 대표하는 사회의 의지에 철저히 달려 있다는 인식은 매우 경악스러울 뿐만 아니라 매우 정치적이다. 여성을 단순히 태아를 품는 인큐베이터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문제적 사고이기 때문이다.

내가 의지해 살고 있는 지리산의 또 다른 이름은 ‘어머니 산’이다. 어머니처럼 안고 품어주는 산이라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바위가 많은 악산이 아니고 포근한 느낌을 주는 산 속 길들을 품고 있어 지리산을 다녀본 이들은 그 별칭에 절로 동의가 되기도 한다. 게다가 옛날부터 여신인 성모신을 모시는 산이었다는 기록이 있고 노고단이 늙은 할머니신에게 제를 지내는 곳이었다는 점도 지리산이 이런 별칭을 갖게 된 유래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곧 이 산자락에 터를 잡고 사는 여성들의 지위를 보장해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여신이건 모성이건 그 무엇이 있건 여성이 온전한 인간 개인으로 처우받지 못한다면 이 모든 수사들은 그저 남성사회를 위해 아이를 낳아주는 도구로 전락해 있는 여성이 처한 현실을 보지 못하게 하는 가림막일 뿐인 것이다.

여성은 인간이기를 원한다. 자신의 몸에 그 누구도 허락없이 침범하지 못하는 고유의 영토를 가진 존재이기를 원한다. 어떤 남성도, 국가도 그 영토를 침범할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 적어도 그것이 근대 국가의 기본적 합의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 한국 정부는 국가의 이름으로 중대한 범죄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박이은실 <여/성이론>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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