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1.19 18:50
수정 : 2017.01.19 18:57
박이은실의 지리산 책읽기
허당이는 생김새나 덩치는 고라니만 하게 큰데 사람만 보면 겅중거리며 허겁지겁 달아나는 어느 개에 붙여준 이름이다. 마을을 어슬렁거리던 녀석을 본 것은 지난해 오월께부터다. 처음 봤을 때도 이미 제법 컸지만 아직은 다 자라지 않은 얼굴을 한 어린 개였다. 붉은색 목줄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놀러 나왔다가 길을 잃었거나 버려진 개였다.
정해놓고 살 집이 없던 허당이는 마을 인근 논밭에서 혼자 지냈다. 다른 집 개들을 찾아 먹을 것을 얻거나 훔쳐 먹고 연명하다가 종종 인간들이 키우는 닭을 잡아먹기도 했다. 원래 겁도 많았지만, 사람들에게 미움받는다는 걸 아는지 허당이는 시간을 두고 봐도 좀처럼 곁을 주지 않았다.
그러던 두어 주 전,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의 어느 날, 왼쪽 뒷다리를 잔뜩 움츠린 채 절룩거리며 마을 야산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뒷모습을 보았다. 허당아, 부르자 잠깐 뒤를 돌아보는 듯했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며칠 보이지 않더니 어느 날부터 근처 야산의 한 무덤 위 너럭바위 위에서 우우 애처로운 신음 소리를 크게 내기 시작했다. 다친 다리가 무척 아픈 모양인 듯했다. 구조하려 해도 누가 혼자 어찌해 볼 엄두가 안 나는 녀석이라 이장님과 통화도 해보고 텔레비전 동물프로그램과 동물보호단체, 유기동물 구조망에 올라있는 동물병원에도 전화를 해보았다. 한 동물병원 수의사가 다음날 꼭 와보겠다고 약조를 해주었다.
지리산 인근 농촌 마을인 이곳에는 소도 살고 돼지도 살고 닭도 산다. 그런데 우리집에 사는 고양이 ‘우렁찬’과 ‘우렁진’, 열다섯살 난 개 ‘가을이’나 서너살 된 ‘밍키’, 심지어 혼자 떠돌며 살았던 ‘허당이’도 이름이 있지만 돼지, 소, 닭이 각자의 이름으로 불리는 경우를 본 적은 없다.
이름이란 신기한 역할을 한다. 집단성이 아니라 고유의 개별성을 인식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가을이와 밍키와 허당이는 모두 개지만 각자 이름을 가지고 있기에 비로소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진 존재로 인식된다.
이름 없는 가축들은 태어나 한 번도 제 고유의 이름을 가져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죽을 때도 동물명과 숫자 속에 가려진다. 조류독감(AI)과 같은 전염병이 돌 때마다 산 채로 묻히는 끔찍한 일이 반복되어도 그 모든 죽음은 ‘닭 천만 마리 살처분’이라는 말속에 가려진다.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 육식주의를 해부한다>에서 저자인 멜라니 조이는 2001년 영국의 구제역 파동 때 일화를 소개한다. 당시 영국 정부는 동물보호운동가들의 반대에도 구제역에 노출됐다고 판단된 소 수백만 마리를 도살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는데 신문에 ‘피닉스’라는 이름의 송아지 사진이 실리면서 결국 정책을 수정했던 것이다. 1995년 뉴잉글랜드의 한 도축장에서 도살장으로 끌려가던 행렬에 있던 한 젖소가 1.5m 높이의 울타리 위로 몸을 날려 숲으로 달아났던 일도 소개한다. ‘에밀리’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 젖소는 40일을 추위 속에서 추격을 따돌리며 숨어 지내다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작은 동물보호소에서 여생을 잘 살다 죽었는데 장례식도 치러졌고 무덤에 묻혔으며 실물 크기의 동상까지 가지게 되었다. 그냥 한 젖소가 아니라 ‘에밀리’라는 이름 덕일 것이다.
집단명과 숫자로 처리되는 죽음은 인간의 공감능력을 마비시켜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게 만든다. 멜라니 조이는 AI나 구제역같은 문제가 반복되는 현실의 근본에 바로 육식은 정상이고 자연스럽고 필요하다고 믿게 만드는 ‘육식주의’ 이데올로기가 있다고 지적한다. 공장식 축산은 불가피하고 AI나 구제역이 발생하면 어쩔 수 없이 ‘살처분’을 해야 한다고 믿는 것과 같은 그런 것 말이다.
박이은실 <여/성이론>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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