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4.13 18:51
수정 : 2017.04.13 19:01
박이은실의 지리산 책읽기
자신의 필멸성과 취약함을 아는 존재는 ‘자기 보존’에 대한 두려움을 쉬이 갖는다. 도시를 떠나 소위 자연 가까이서 살다 보면 이런 체험을 자주 하게 된다. 갑작스러운 돌풍, 며칠째 그치지 않는 비, 흙바람을 일으키는 가뭄, 길을 나서기 힘들게 만드는 땡볕, 돌아서기 무섭게 자라는 풀, 신경질을 돋우며 따라붙는 날파리, 밭작물을 홀라당 먹어치우는 새 떼, 닭장을 습격하는 족제비, 마을을 떠돌며 사는 험상궂은 유기견, 꽃나무마다 붕붕대는 위협적인 벌들, 밤이면 을씨년스럽게 컹컹대는 고라니…. 자연이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때 그것은 마냥 사랑스럽기만 한 존재가 아니다. 귀찮고 때로는 무섭고 그야말로 나의 보존을 위협하는 공포의 대상이 된다.
자기 보존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인간으로 하여금 신을 창조하게 했고 과학을 신봉하게 만들었다. 과학의 또 다른 이름은 합리성이며 계몽은 이들의 대표명이다. 독일의 두 철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와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은 인간에게서 공포를 몰아내고 인간을 세계의 주인으로 세우는 목표를 추구해왔다고 말한다. 취약한 인간에게는 아는 것만이 힘이다. 계몽의 이름으로 인간은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 자신마저 완전히 지배하기 위해 자연을 이용하는 법을 배우고자 하였다. 계몽의 이름 아래에서 개연성을 가지지 않는 것, 통일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 계산 가능하지 않은 것, 공식이 될 수 없는 것, 유용성의 척도에 맞지 않는 것 등은 모두 의심스러운 것이다. 의미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사실일 뿐이고 그 사실을 발견하는 것일 뿐이다. 계몽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그것을 신앙처럼 숭상하도록 만들어 왔다.
2차대전이라는 세기의 야만이 세상을 뒤덮고 있던 시기, <계몽의 변증법>을 쓴 이 두 철학자는 계몽이 인간의 두려움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동시에 무엇보다 중요한 상상력을 인간에게서 빼앗아갔다고 비판했다. 상상력은 또한 공감력의 기반이기도 하다. 계몽된 세상에서 인간은 달에 절구질하는 토끼는 살고 있지 않으며 아기는 삼신할머니가 점지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런데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이처럼 완전히 계몽된 지구에는 계몽이 약속한 희망은커녕 오히려 재앙만이 승리를 구가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2014년 4월16일. 거대한 여객선이 바닷속으로 서서히 가라앉았다. 배 안에는 생목숨들이 있었고 배 밖의 사람들은 그 현장을 생방송으로 지켜보았다. 구조는 없었다. 계몽은 무엇을 하였는가? 2009년 8월5일. 평택 쌍용자동차 공장 지붕에 시뻘건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경찰들이 불길 속에 넘어져 있는 사람들을 곤봉으로 때려잡고 있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었다. 그들이 지붕 위로 올라간 까닭이라고는 단지 ‘함께 살자’는 말을 하려고 한 것뿐이었다. 당시 노동자들 중 한 사람인 한상균이 지금도 감옥에 갇혀 있다. 계몽은 무엇을 하였는가? 2009년 1월20일. 서울 용산의 한 건물 옥상. 철거에 반대하며 사람들이 그곳에 올랐고 그들을 쫓아내겠다며 경찰들이 덩달아 따라 오르면서 불현듯 옥상이 순식간에 불길에 타올랐고 대낮 화염이 그곳에 있던 이들을 집어삼켰다. 그곳에 무엇이 있었던가? 사람들이 대답했다. 여기, 사람이 있다. 계몽은 무엇을 하였는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인류가 왜 계몽을 통해 진정한 인간 상태에 들어서기보다 새로운 종류의 야만상태에 빠지게 되었는가를 묻는다.
대선 정국. 대통령이 되고자 나선 후보들은 각자 성장과 더 나은 내일을 약속하지만 나는 그 약속을, 특히나, 과학의 이름으로 하는 약속을 이제 쉬이 믿지 않는다. 세월호가 우리 곁으로 되돌아왔다. 가만히 있지 않은 사람들은 외쳐왔다. 함께 살자. 여기, 사람이 있다. 나는 단지 그 말만을 믿을 뿐이다.
박이은실 <여/성이론>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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