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6.01 18:55
수정 : 2017.06.01 19:48
박이은실의 지리산 책읽기
너른 들판에 각종 작물들이 푸르게 자라고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대개는 한껏 한가로운 기분에 취하게 된다. 번거로운 시기를 특별히 가리키는 말이 불필요할 만큼 24시간 휙휙 돌아가는 도시에서와는 다른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농촌 마을에서 생활하다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음을 깨닫게 된다. 농번기와 농한기라는 말이 따로 있듯이 바쁜 때가 있으면 한가로운 때도 분명 있겠으나 이 말은 부분적으로만 사실이다. 벼농사야 요즘은 기계를 써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모내기 전후와 추수 때가 특별히 번거로운 시기이지만 밭일이나 과수원일 등은 꼭 그렇지도 않다. 특히, 여러가지의 밭작물을 한꺼번에 또는 한 밭에서 순서를 바꿔가며 키우거나 하우스 농사를 짓는다거나 무농약, 무비닐 농사를 지어 풀과 작물이 끊임없이 자리다툼을 해야 하는 경우라면 바쁜 시기가 따로 있지도 않다. 가사노동과 다른, 소득원이 되는 노동을 추가로 하게 되면 더욱이 농촌에 거주하는 시민들도 거의 일년 내내 참 분주하다.
인류의 존재사를 2백만년 전부터 훑어보면서 현 인류, 곧 호모 사피엔스(‘슬기로운 사람’)의 역사를 미래까지 내다보며 흥미롭게 다룬 책 <사피엔스>. 저자인 유발 하라리는 인류가 농업혁명을 이루면서 지금까지 어떤 변화들이 생겨났는지, 그리고 닥치고 있는 미래의 모습은 어떠할지를 흥미롭고도 비판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사피엔스는 15만년 전부터 등장한 인종인데 그보다 훨씬 전 시기부터 존재했던 호모 에렉투스와 호모 네안데르탈렌시스를 멸종시키고 현 인류의 조상으로서 자리매김하였다. 하라리는 사피엔스가 이야기를 지어내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 인지혁명, 농사를 지어 식량을 조달하게 된 농업혁명, 무지를 깨우치고자 시작한 과학혁명 등 세 가지 주요한 혁명을 이루었다고 말한다. 그 중에서 생존과 직결되어 있는 만큼 가장 중요한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 농업혁명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지적을 한다. 흔히 농업혁명을 통해 식량 생산량이 늘어나 인간의 삶이 이전 시기에 비해 훨씬 풍요롭고 안정적이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큰 착각이라는 것이다. 농업혁명 이전 시기의 사피엔스인 고대 수렵채집인은 개인 수준에서 볼 때 인류 역사상 가장 아는 것이 많고 기술이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사냥하는 동물과 채집하는 식물을 잘 알고 있어야 생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후 시기보다 더 활기차고 다양한 방식으로 시간을 보냈고 기아와 질병의 위험도 훨씬 적었다. 그러나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사피엔스들은 해가 뜰 때부터 질 때까지 씨를 뿌리고 물을 대고 잡초를 뽑고 가축화한 동물들을 좋은 목초지로 끌고 다니면서 거의 모든 시간과 노력을 몇몇 동물과 식물 종의 삶을 조작하는 데 바치게 된다. 그러니 농업혁명 이전보다 더 많은 여유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이 결코 아니었다. 게다가 사용할 수 있는 식량의 총량은 증가했으나 쌀, 밀, 옥수수, 감자, 수수, 보리와 같이 작물화에 적합한 제한된 단일 작물을 주로 먹게 되었기 때문에 베리와 버섯, 과일과 달팽이 등 매일매일 다양한 먹거리를 섭취한 덕분에 영양상태가 좋았던 이전의 사피엔스보다 더 나은 식사를 하거나 더 나은 영양상태가 된 것도 아니었다.
하라리의 말처럼, 7만년 전에 아프리카의 한구석에서 자기 앞가림에나 신경쓰며 살았던 별스럽지 않았던 동물인 사피엔스는 지금까지 여러 혁명들을 이루면서 스스로의 삶의 질에 그리고 이 지구에 어떤 자랑스러운 기여를 했는가? 이 지구 행성에서 일어나는 고통의 총량을 줄였는가? 사피엔스가 존재하게 된 이래 지구 대형동물의 절반이 멸종했다고 한다. 이제 사피엔스는 사이보그와 에이아이(AI)의 시대를 열며 자신의 신체와 마음을 포함해 자연 자체를 마음대로 조작하는 능력까지 손에 넣을 태세다. 지금까지 사피엔스가 지구상에 일으킨 어떤 끔찍한 잘못에도 제대로 책임진 적이 없음을 깨닫는 일은 아직은 늦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에게 간곡히 묻고 싶다. 호모 사피엔스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박이은실/<여/성이론> 편집주간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