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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11.02 19:43 수정 : 2017.11.02 20:27

박이은실의 지리산 책읽기

가버렸다. 그동안 많은 이들이 갔고 시월도 가버렸다. 올 한해도 육십일 남짓밖에 남지 않았다. 내가 지리산이 가까운 마을로 이주하니 도시의 지인들은 유유자적한 일상을 보낼 것이라 기대를 한다. 그러나 내가 본 나 이전에 귀농귀촌해 사는 이들의 일상이 그리 유유자적해 보이지는 않았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는다고 시인은 말했지만 살 집이 없던 나는 직접 집을 짓기 시작했고 그러니 올 한해의 내 일상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집을 지으면 십년이 늙거나 이혼을 하거나 죽는다는 등의 말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그러니 그런 일을 저질러놓고 한 번의 후회가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런 후회보다 더 큰 아쉬움은 집 짓는 수고로움에 압도되고 휘둘리는 동안 어느결에 한 해가 거의 흘러간 것에 대해서다. 그 시간을 수습해 돌려놓을 길이 결코 없다는 자명한 사실 때문이다. 문득 돌아보니 시간이 말 그대로 불현듯 사라져버렸다.

가버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대한 감각을 마르셀 프루스트만큼 세포 하나하나에 와 닿게 쓴 사람도 없을 것이다. 제목조차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다. 대하서사와는 성격이 다른 책임에도 책의 분량은 프랑스어 원본으로 일곱권, 한국어 번역본(국일미디어의 김창석 역, 민음사의 김희영 역)으로 열한 권에 달한다. 이를 두고 프루스트의 동생은 사람들이 아주 많이 아프거나 다리가 부러지거나 하기 전에는 이 책 전권을 모두 읽을 기회를 얻지 못할 거라며 슬퍼했다고도 한다.

알랭 드 보통은 <프루스트가 우리의 삶을 바꾸는 방법들>(청미래)에서 프루스트의 섬세하고 상세한 문장과 작법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묘사 능력보다도 훨씬 더 잘 묘사할 능력을, 즉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인식하기는 하지만 차마 우리 자신의 힘으로 공식화하지는 못했던 인식을 지목하는 능력으로까지 나아가도록 해주며 이것이야말로 소설이 갖는 큰 미덕 중 하나라고 평한다. 이를 통해 우리의 정신은 마치 의식 속을 떠돌아다니는 특정한 대상을 잡아낼 새로운 주파수를 가지게 된다.

“너무 빠르지는 않게요.” 프루스트가 어느 외교관에게서 그가 참석했던 국제회담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동안 그에게 몇 번이나 요청했던 말이란다. 이 일화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그가 왜 장황하게까지 보이는 묘사적 문장을 그토록이나 빼곡하게, 시종일관 써내려갔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이는 그가 가진 예술관과 닿아있다. 보통은 프루스트에게 예술작품의 위대함은 그 소재 자체가 가진 외관상의 성질이 아니라 오히려 그 소재와는 무관한, 그 소재에 대한 차후의 처우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어쩌면 삶의 위대함도 그 삶 자체가 가진 외관상의 성질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삶의 내용과는 무관한, 그 삶에 대한 우리 자신의 처우와 깊은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연초록 새잎이 돋았던 호두나무가 어느새 가지만 앙상히 벌리고 섰다. 저만치 보이는 지리산 자락들에서 단풍도 다음 장소를 향해 달려간다.

“너무 빠르지는 않게요.” 돈만 없는 게 아니라 시간도 없는 대다수 사람에게 이 말은 꺼내는 데에 용기가 필요한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음을 목도하거나 죽을 경험을 하고 난 이들은 어쩌면 상실과 고통의 크기만큼 용기를 갖게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가만히 읊조려본다. “너무 빠르지는 않게요. 프루스트를 마저 읽고 싶거든요.”

박이은실 <여/성이론>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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