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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2.01 20:04 수정 : 2018.02.01 20:07

박이은실의 지리산 책읽기

인기 팟캐스트 <비밀보장>의 에레나(김숙 분)씨는 ‘결정장애를 앓고 있는 이들을 위해 속 시원한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인물이다. 상담자의 이름은 ‘김지○’ 등으로 일부 가려져 비밀에 부쳐진다. 짬뽕과 짜장면 중 점심메뉴로 무엇을 선택할지에서부터 가슴성형과 지방흡입 중 무엇을 우선해서 할지에 이르기까지 청취자들이 보내는 고민은 다양하다. 그때마다 에레나씨는 그들을 ‘대신해’ 단박에 선택을 내려준다. 이 팟캐스트의 인기비결 중 상당부분이 김숙의 단호한 결정력에 있을 것이다.

스스로의 선택에 대한 불확신과 이로 인한 불안감은 자본주의적 질서가 만들어내는 보편적 결과물로 봐야한다. <선택이라는 이데올로기>(후마니타스)에서 레나타 살레츨은 이 점을 깊이 짚어낸다. 살레츨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우리로 하여금 수많은 선택지들 속에서 가장 나은 선택을 하기에는 스스로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갖게 만든다. 동시에 우리가 앞으로의 길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고 우리의 삶을 개선할 수 있다는 생각도 갖도록 만든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상황을 이용한다.

자기계발서는 여기서 자본주의의 첨병과 같은 역할을 한다. 평범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결점들과 부족함에 관심을 집중시켜 자기 결함감에 노심초사하게 만들고, 자기가 만들어 놓은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더 많은 도움, 더 많은 책, 더 많은 코치를 필요로 하게 만든다. 살레츨이 사례로 언급하고 있는 잡지 편집자 제니퍼 니슬라인은 나은 삶을 위해 2년 동안 각종 자기계발서의 조언에 전적으로 의지해서 살아보기로 선택했다. 살 빼는 법, 집안 정리법, 좋은 부모와 좋은 아내 되는 법, 그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법 등 모든 조언을 열심히 충실하게 따랐다. 그러나 그 결과 자기계발서들이 약속한 행복과 성취감을 얻기는커녕 심각한 공황발작을 얻었다. 부족감과 편집증이 완화되기는커녕 오히려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국가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기업의 이윤추구 자유를 최대화하라는 신자유주의적 가치를 받들어 우리는 자유롭게 경쟁하는 개인이 되기 위해 열심히 자기계발서를 읽고 잠을 줄여가며 노력했다. 필요하다면 성형도 불사하며 ‘노오력’했다. 그러나 그런 우리에게 돌아온 것은 삶에서 누릴 수 있는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만 하는 ‘엔(n)포 세대’의 미래이고, 소수 권력자들이 특혜를 입고 멀쩡한 업소 화장실에서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하는 사회다. 결코 성폭력 피해자 되기를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이 학교에서, 직장에서, 길거리에서, 온라인에서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 성폭력의 피해자가 됐다. 결코 가난을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이 아이 분유와 기저귀를 살 돈이 없어서 수치와 굴욕 속에서 죽어간다. 출생률 위기 사회인 나라에서 이미 잘 태어난 아이들마저 매일매일 자신의 선택과 무관하게 목숨을 잃는다. ‘누구나 성공해 돈을 많이 벌 수 있으니 가난한 사람은 열심히 일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관념에 의지’해 출발한 자본주의는 이런 상황조차 이들의 선택의 결과라 믿게 만들고 싶어한다.

선택이 개인적 삶을 꾸려 나가는 데 필요한 궁극의 수단으로 찬양될 때, 사회적 비판이 자리할 자리는 사라진다고 살레츨은 지적한다. 선택 이데올로기는 개인에게 자신이 자신의 안녕과 인생방향의 완전한 주인이라는 생각을 심어주어 사회구조적으로 가능한 변화에 관심을 쏟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 말하는 선택의 자유란 선택의 결과에 대한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고스란히 떠넘겨 시스템을 떠받치는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그 사회의 질서가 변하지 않으면 내 삶의 궁극적인 변화 또한 이뤄낼 수 없다. 선택을 해야 한다면 사회를 변화시키는 선택이 필요하다.

박이은실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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