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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
박이은실의 지리산 책읽기
최근, 중년의 남성들과 제법 긴 시간 이야기 나눌 기회가 있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성관념을 다시 생각해보는 프로그램을 함께 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결은 비슷하지만 그 내용과 정도가 크게 다른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눴다. ‘남성’이라고 결코 균질한 집단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그 와중에도 무척 흥미롭고 동시에 걱정스러운 이야기가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명백히 심각한 성추행이고 성폭행인데 정작 이야기를 전하는 당사자 남성은 그 일을 불쾌하긴 해도 흘려 넘겨버릴 수 있는 일이거나 심지어 일종의 무용담으로 여기는 듯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 필독서 중 하나인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문학동네)에서 저자 벨 훅스는 페미니즘의 정의를 간결하게 제시한다. 페미니즘이란 “성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에 입각한 억압, 폭력, 착취를 종식하는 운동”이라는 얘기다. 이를 기반으로 훅스는 성에 관해서도 몇 가지 중요한 분석을 내놓는다. 이를테면, 이런 얘기들. ‘성차별주의에 젖어있는 많은 이들은 남성의 성행위가 페니스의 경도나 발기 지속 여부에 의해서만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많은 남성은 여성의 성이 남성의 욕구에 봉사하고 만족하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남성은 여성과의 잠자리에서 여성과 진심으로 기쁨을 주고받기를 원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녀의 성적인 행위가, 다시 말해 그녀가 섹스하고 싶어 하느냐 그렇지 않으냐가 남성 자신의 욕망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열렬히 원하고 흥분되어 있고 해방된 여자와 함께 그렇게 하는 것은 재미있는 반면, 그 여자가 섹스 없는 공간을 원한다고 선언할 때는 재미를 잃는다. 많은 남성들은 자신의 성욕을 발산하기 위하여 여성을 손쉽게 성적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는 통념을 가지고 있고 또 그 생각을 적극적으로 유통한다.’
나는 여기에 하나 더 보태려고 한다. 많은 남성은 자신 또한 성적 대상이라는 사실을, 자신 또한 성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이런 태도는 의연함이나 강인함이 아니라 인지부조화 상태에서 비롯된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부정함으로써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이 질서 안에서 성적 피해자는 여성이어야 한다. 따라서 성적 피해자가 되는 일은 곧 여성으로 전락하는 것, 남성성을 잃고 남성의 정체성을 잃는 것, 여자가 되는 것이다. 남성은 성적 가해자가 될 수는 있어도 피해자는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사실 이런 생각이 바로 여성들을 손쉬운 성적 대상으로 만들고 성폭력의 피해자로 만드는 체제의 핵심이다. 이를 양성체제(two genders-system)라 부를 수 있다. 양성체제 운영의 핵심 원리를 다소 거친 도식으로 만들면 남성=인간, 여성=성, 남성=이성(理性), 여성=몸이 된다.
피해자가 반드시 약자의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편견이다. 약자가 되는 일이 나쁜 것도 아니다. 약자의 위치에 제대로 서서 볼 때 오히려 세상의 질서와 폐해가 제대로 보인다. 페미니즘은 그렇게 세상을 다시 읽어내는 시력을 길러준다. 그렇기에 당신과 나,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 될 수 있다.
삼월까지 눈이 내렸지만 한파에 꽁꽁 얼었던 땅을 견딘 나무들에 이제 봄물이 잔뜩 올랐다. 산도 울긋불긋 꽃 대궐이다. 농부에게 이것은 씨 뿌릴 때를 알리는 신호다. 나 같은 초보 텃밭 농부도 해가 뜨기 무섭게 씨를 뿌리고 모종을 심기 위해 부지런을 떨게 된다. 틈틈이 텃밭에 나가 혼신의 힘을 다해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동안 마음은 절로 하나로 집중된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기를 바라는 마음. 콩을 콩이라 하고, 팥을 팥이라 부르기로 약속했기에 우리는 어떤 게 콩이고 팥인지 이해하며 소통할 수 있다. 같은 이치로, 피해를 피해라 부르고 상처를 상처라 말하면서 제대로 들여다보아야 그것을 어떻게 대하고 가꿔야 할지도 알게 된다.
박이은실 지순협대안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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