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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5.03 20:47 수정 : 2018.05.03 20:57

박이은실의 지리산 책읽기

봄은 새싹의 계절인 만큼 또한 시골의 계절이다. 집 앞 작은 텃밭에서부터 너른 들녘은 물론이고 논두렁, 밭두렁에도, 천변 바위틈에까지 새싹들이 땅을 뚫고 올라온다. 작고 연한 잎 그 어디에 자기 무게의 몇 배나 될 흙을 밀어내고 땅을 뚫고 올라오는 그런 힘이 들어차 있는 것인지, 지켜볼수록 감탄을 하게 된다. 그중 더러는 한 계절을 겨우 나고 인간의 음식이 되기도 하고, 더러는 이듬해 그리고 그 이듬해에도 여전히 세상에 머문다.

집에서 차로 얼마 가지 않으면 천년을 넘게 살고 있다는 소나무가 있다. 그 위엄한 자태를 마주 보고 있노라면 구름도 누워 쉬어간다는 깊은 산골짝 마을의 뒷산에서 마을을 굽어보며 겪었을 그 천년은 대체 어떤 시간이었을까 궁금해진다. 레이철 서스만의 저서 <위대한 생존-세상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나무 이야기>(윌북)에는 상상하기에도 아득한 시간을 살아낸 나무들이 등장한다. 칠레 아타카마 사막에는 3천살이 넘는 식물이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는 2천살이 넘는 자이언트 세쿼이아가 살고, 스웨덴 달라나의 가문비나무는 9500살이 넘었다. 스리랑카 아누라다푸라에는 2200년을 넘게 산 보리수가 있고,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에는 1만3천년을 산 유칼립투스가 있다. 중국 구이저우에는 4천년을 넘게 산 은행나무가 있고, 일본 야쿠시마에는 7천년을 살아온 것일지도 모르는 삼나무가 있다.

땅에 이런저런 씨를 뿌리고 묘목들을 심어놓은 뒤여서인지 한 인간의 삶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시간을 살아낸 나무들은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더욱 하게 된다. 삼월에 뿌린 씨앗들은 이제 뾰족이 푸른 싹을 틔웠다. 옮겨 심고 한동안 애를 태웠던 나무들도 둔탁한 갈색 가지와 둥치 밖으로 놀라운 연초록 새잎을 틔웠다. 어떤 새싹은 다른 것들보다 유난히 튼실하고 어떤 나무는 다른 나무들보다 유난히 당차게 잎을 뻗어내고 있다.

그렇게 서로 다른 식물들을 보고 있자면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그렇지만 그들이 허공에서 자라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내 눈이 가는 곳은 그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땅이다. 논농사를 짓던 땅에 물을 말리고 적당히 마른 땅을 갈아 뒤엎어 흙이 숨 쉴 곳들을 만들어 주고 밑거름을 뿌려 땅심을 북돋으려 애는 썼지만, 논에서 밭이 된 곳은 당장의 비옥도를 따지면 형편이 없는 수준이다. 잡초들조차 쉽게 자라지 않았던 것을 보면 척박함의 정도가 어떤지 농사 무지렁이인 나조차 가늠이 간다. 바람막이 되어줄 것도 별스럽게 없는 곳에서 그야말로 고군분투해서 싹을 틔우고 자라고 있는 이들을 보노라면 안쓰러운 마음이 절로 생겨난다.

집 옆길을 따라가면 곧 만날 수 있는 작은 숲에는 기름진 비옥한 땅에서 쑥쑥 자라 사는 나무들이 있다. 그 숲에는 무엇보다 시간이 만들어낸 비옥함이 있다. 먼저 났던 생명이 밑거름이 되어주고 존재하는 각자의 최선이 모두 함께 모여서 만들어낸 비옥함이다.

나이가 드니 하게 되는 어쩌면 쓸데없는 일 중 하나가 과거를 반추하는 일인 듯싶다. 반추의 내용 중 상당 부분은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던 상황들에 대한 것이다. 집, 학교, 사회, 친구나 어른들과 함께한 자리를 다르게 겪을 기회가 있었다면, 우리가 싹을 틔우고 양분을 먹고 자랐던 그곳이 그때와 달랐더라면 지금이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가난한 노동자 부부의 자식 중 하나로 태어나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그리고 문재인 정부를 살게 된 사십대 중반의 여성으로서 갖게 되는 회한이 있다. 더는 개천에서 용이 나지도 않고, 노동자가 한번 비정규직의 길로 들어서면 비정규직으로 삶이 점철되는 사회에선 추억이 아니라 회한을 가지게 될 이들이 더 많을 것이라 마음이 아프다. 채소가 자라고 꽃이 피고 나무가 크는 땅을 지켜보면서 될성부른 나무는 회한이 아니라 좋은 추억이 많이 생겨날 수 있는 사회가 선결 조건이라는 생각을 더욱 하게 된다. 새로운 세대들은 회한보다는 추억이 더 많은 세대가 되면 좋겠다. 통일이든 지방선거든 그렇게 되도록 일익을 담당하면 좋겠다. <끝>
박이은실

박이은실 지순협대안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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