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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10.08 20:47 수정 : 2016.12.22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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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일기-인조, 청 황제에게 세 번 절하다
작자 미상, 김광순 옮김/서해문집(2006)

나라가 망하는 데는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 상황에 따라, 시대에 따라, 무엇보다도 지도층의 능력에 따라 다를 것이다. 조선 제16대 왕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고작 사십여 일을 버티다 성을 버리고 나와 청 황제 앞에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바닥에 찧는 수모를 겪었다. 조선이 망한 것은 아니라고? 그렇다면 히로히토가 이끌던 제국 또한 두 방의 원자폭탄을 맞고도 ‘일본’이라는 국명은 살아남았으니 ‘일본 패망’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 안 되리라.

한겨레로서 뜨거운 피가 흐르는 백성이라면, 그 순간 나라가 망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그러기에 연전에 낙양의 지가를 올린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에 새겨진 글자들에서는 뜨거운 피가 흐른다.

그러나 역사는 뜨거운 피를 용납하지 않는다. 소설이 살아남은 자의 감정을 기록한다면, 역사는 죽은 자의 행적을 기록한다. 그러하기에 역사에 흐르는 피는 차갑디차갑다.

황금 100냥, 사슴가죽 100장, 담배 천 근, 수달피 400장, 다람쥐가죽 200장, 후추 열 말, 흰 모시 100필, 오색 명주 2천 필, 삼베 400 필, 오색 베 만 필, 베 천 필, 쌀 만 석, 기타 여러 가지.

1639년 가을부터 바치라고 조선에 항복의 조건으로 제시한 청나라의 물건 목록이다. 소설은 뜨거운 감정 속에 이 엄청난 물건들을 묻어버릴 수 있으나, 역사는 눈 부릅뜨고 사실을 기록한다. 나는 이 물건들 목록에서 지도층 잘못 만나 헛되이 죽어간 조선 백성들의 흔적을 확인한다.

역사는 두려운 존재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금언은 결코 위인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역사는 악인의 이름을 더욱 깊이, 그리고 멀리 기억한다. 예수는 “그들은 그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고 용서해줄 것을 기도했으나, 역사는 무지한 자들조차 결코 용서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임진년의 화를 당한 후 역사의 차가운 피를 확인한 광해군이 냉철하게 실리외교를 펼치자, 파병해준 주군에 대한 배은망덕을 비판하며 그를 끌어내린 자들은 역사의 처절한 복수를 당하기에 이른다.

<산성일기>를 기록한 이는 임진왜란과 정묘호란을 통해 분명 관용 없는 역사의 심판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남한산성 안에서 일어난 일을 오직 손으로 기록하였다. 이름도, 감정도, 판단도 남기지 않은 채. 그리고 그 기록은 400년 가까이 전해져 오늘, 우리에게 말한다.

“역사를 두려워하라! 너희들의 탐욕과 무지를 결코 잊지 않을 테니, 너희 두 손에 움켜쥔 권력과 왜곡이 잊힐 거라 오해 마라. 역사는 반드시! 반드시 기억한 후 너희에게, 아니 너희 후손에게 되돌려줄 것이다.”

2015년이 끝을 향해 달리는 오늘, 그 역사는 다시 우리에게 경종을 울린다. 그러나 귀가 없는 자들은 듣지 않을 것이니, 내가 두려운 것은 오직 역사의 차가운 피다. 감정의 조각 하나 없이 심판을 내릴 바로 그 피.

김흥식 서해문집 대표
8500원! 다국적 커피 1.5잔의 값.

이름 모를 당신께서 저희에게 전해주신 교훈의 가격입니다. 한량없이 죄송합니다.

김흥식 서해문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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