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가 고른 스테디 셀러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파커 J. 파머 지음, 김찬호 옮김/글항아리(2012) 지난 6월24일에 영국의 유럽연합 잔류 여부가 국민투표를 거쳐 탈퇴로 결정된 후 ‘민주주의의 실패’라는 평가와, 오히려 ‘민주주의의 부재(혹은 결핍)’가 위기를 불러왔다고 보는 분석이 엇갈렸다. 이번 ‘브렉시트’ 사태는 여러 각도에서 분석할 수 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일을 계기로 세계적으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이 다시 한 번 중요하게 떠올랐다는 점이다. 미국의 사회운동가 파커 J. 파머가 쓴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은 이런 상황에서 꼭 한 번 읽어볼 만한 책이다. 이 책은 민주주의의 본래 의미를 되짚어보는 정치철학서이자, 민주주의를 시민의 것으로 복원하기 위한 실천 방안을 제시하는 실용적인 정치 팸플릿이다. 한국어판 부제 ‘왜 민주주의에서 마음이 중요한가’가 잘 보여주고 있듯이, 이 책의 키워드는 ‘정치’, ‘민주주의’, ‘마음’이다. 여기서 파머가 말하는 ‘마음’은 단순히 기쁨이나 분노 같은 감정이 아니라 더 깊은 곳에 있는 자아의 핵심이다. 마음은 행동의 원천이며, 정치의 동력이다. 시민 개개인의 단련된 마음이야말로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힘이다. 그런데 마음은 곧잘 상실과 패배, 좌절, 배신을 만나며 부서진다. 사람이든 돈이든 이념이든 온 마음으로 붙잡고 있던 것에서 좌절을 겪을 때, 우리의 마음은 비통함에 빠진다.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타자에 대한 두려움을 교묘히 이용해 ‘분리하고 지배하는’ 정치, 갈수록 커지는 부(富)의 힘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과 무력감을 느끼며 환멸과 냉소의 공간으로 물러난다. 공적 사안에 대해 발언하고 이견을 드러내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늘수록 민주주의는 점점 더 위태로워진다. 저자는 사람들이 정치적 쟁점에 대해 갈등을 두려워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발언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공동체에 존재하는 갈등은 당연한 것이며, 그 갈등과 긴장을 견디고 끌어안을 때 민주주의의 에너지가 된다. “나는 갈등이 없는 공공 영역을 상상하지도 염원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죽음이 없는 삶을 염원하는 것과 비슷한 환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전체주의 사회에서만 갈등은 추방된다.” 동의하지 않을 자유는 민주주의의 위대한 선물 가운데 하나다. 이견을 드러낼 때마다 더 좋은 답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차이는 문제가 아니지만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악마화’하는 태도는 시민사회를 약화시키는 심각한 문제라는 사실이다. 이 책은 쉬운 말로 쓰였지만 쉽게 읽을 수 없다. 사회운동가, 교육 지도자로서 오랫동안 활동해 온 저자의 삶과 사유와 실천이 응축된 이 묵직하고 단단하며 아름다운 책은 매 순간 멈춰 서서 생각하게 만든다. 저자는 케네디 대통령 암살, 흑인 민권 운동, 베트남 전쟁, 9·11테러 사건 등 미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 속에서 수없이 비통함에 빠졌음을 고백하고, 그 어둠 속에서 빛을 향해 빠져나오는 과정에서 찾은 마음의 힘을 우리에게 전하고자 한다. 이승희 교양인 편집장 ※이번주부터 교양인 출판사 이승희 편집장이 집필합니다. 4주 간격으로 세 권의 책을 소개하며, 그중 한 권은 자사 책을 씁니다.
기사공유하기